아산병원학교 “아파도 배울 수 있어요” 김지영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 오뉴월 훈풍처럼 따스하기만 하던 바람도 달력을 훔쳐보기라도 한 양 단단한 냉기를 두르고 거리를 배회한다. 그러나 아산병원 61병동 병원학교 앞, 배움의 열기로 후끈한 이곳에 찬바람은 언감생심이다.

4명의 아이들과 선생님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채 영어 수업이 한창이다. 카디건을 두른 재은이 엄마가 창문 틈으로 교실 안을 연신 기웃거린다. 그 모습은 흡사 아이가 잊고 간 도시락을 챙겨주러 등굣길을 잰걸음으로 밟아온 살가운 모성을 연상시킨다. 밖은 차고 안은 더워 뽀얗게 흰 테가 둘러진 시골학교 창가의 풍경마냥 정겹다. 어디선가 풍금소리라도 울리는 듯싶다.

“애가 수업 잘 받나 싶어서요. 얼마나 기다리고 좋아하는지 몰라요. 병원학교 개교한 첫날부터 빠지지 않고 수업 받고 있어요. 학교가 생기기 전에는 병실에서 지겹다, 지루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거든요. 멍하니 앉아 있거나 하릴없이 슈퍼마켓 돌고 오는 일이 전부였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겨서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수업 일수까지 인정된다니 아이 입장에서는 더더욱 다행이지요.”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색칠하는 재은이가 마냥 기특하여 엄마의 눈동자는 내내 아이의 손끝을 따라 움직인다. 때마침 선생님이 “What is circle in the room?”하고 묻자 “clock!”하는 재은이 목소리가 설핏 새어나온다.

학습능력과 또래경험 유지, 출석수업 인정까지
재은이를 비롯한 소아암 환아들에게 배움의 장을 열어준 아산병원학교는 지난 9월 4일 정식으로 개교했다. 장기적인 투병생활로 학업이 중단되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환아들을 위해 병원에서 공부하고 출석일수까지 인정받을 수 있는 ‘참 좋은 학교’다. 병동 내 놀이방을 리모델링한 교실에는 6대의 컴퓨터와 대형 벽걸이 모니터, 각종 교구와 학년별 교과서, 위인전과 전래동화 등 다양한 책들이 갖춰졌다.

“아이들이 병원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아무래도 학업능력이 떨어집니다. 유급을 당하거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곤 하지요. 이제 병원 안에서도 지속적인 교육의 기회를 제공받게 됐습니다. 학습능력 저하 방지는 물론이고 또래 경험을 유지시켜 줌으로써 훗날 성공적인 학교생활 복귀를 돕게 될 것입니다.”

병원학교 교장을 맡은 소아종양혈액 골수이식과 서종진 교수의 설명이다. 작년에 특수교육진흥법 개정으로 ‘건강장애’가 특수교육대상에 포함됨에 따라,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병원학교 설립 협조 요청을 받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한다.

병원학교 시간표는 성탄절 영화상영 일정표만큼이나 풍성하다. 초등학교 과정의 국어 수학 과학 영어 등 교과목과 유치부 과정의 동화 음악 미술 교과목 외에도 종이접기 독서 영화감상 등 특별활동이 마련되어 있다.

“하루 총 4교시 수업이 진행되는데 전직 교사 5명과 현직 교사 20여 명이 자원봉사자로 활동 중입니다. 교무주임을 맡은 지선화 사회복지사는 원활한 수업진행과 병원학교 살림살이를 총괄합니다. 지난달에는 용산전쟁기념관 내 ‘별난 물건 박물관’으로 현장학습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앞으로도 일 년에 두 번 정도 현장학습을 갈 계획입니다.”



앎의 의지 북돋우는 참 좋은 선생님들
서종진 교장을 필두로 한 병원학교 교사들의 마음가짐은 남다르다. 개교 전 지난 8월 21일에는 백혈병, 소아암 환아의 이해를 돕기 위한 교사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모든 가르침이 그렇듯 세심한 배려로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라야 참교육이 이뤄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27일, 소아암환자 부모모임인 한울타리회에서 주관한 ‘완치잔치’에 병원학교 교사들이 모인 것도 같은 이유다. 마음 한 켠에 완치의 감회를 저장해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양껏 퍼내어주기 위함이다. 오색풍선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동요가락 경쾌하게 너울대는 소강당엔 완치판정을 받은 아이들 백여 명 중 오십 여명이 참석했다. 서종진 교장은 단상에 올라 환아복을 벗은 그들에게 일일이 완치메달을 수여했다. 지켜보는 지선화 교무주임과 교사들의 박수소리가 유독 쟁쟁하다.

“완치된 아이들을 보니 우리 아이들 생각이 간절합니다.‘나도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과 의지를 북돋워주고 싶습니다. 수업시간에 소수그룹으로 가르치니까 한 마디만 해줘도 스펀지처럼 쏙쏙 받아들입니다. 아이들 의욕이 높고 열성적이니까 저도 덩달아 힘이 나고요. 비록 몸은 아프지만 마음은 더없이 순수하고 초롱초롱하고 구김살 없는 아이들입니다.”

병원학교 국어과목을 담당하는 기영상 선생님. 정년퇴임을 한 해 앞두고 있는 그의 제자 자랑은 마치 할아버지 손자 자랑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엄마 생각하는 마음이 갸륵합니다. 한번은 1학년짜리 아이가 한푼 두푼 모아서 엄마에게 효도하고 싶다고, 그래서 절대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글을 쓰더라고요. 아이들이 사려 깊고 너무 의젓합니다.”

평소 봉사에 뜻이 있었던 차에 병원학교 교사를 희망했다는 그는 ‘아이들에게 배우는 기쁨’을 체험하는 귀한 시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병원학교에서 느낀 감동은 재직 중인 방산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돋을새김 된다니, 희망의 꽃씨를 널리 전하는 행복한 교사다.

“힘든 치료, 수술 전후에도 수업에 참여해요”
병원학교는 아이들의 투병생활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지선화 교무주임은 아이들이 검사나 수술하러 가기 전 침대에 누운 채로 와서까지 수업에 참여하는가 하면, 그 아프다는 주사를 맞고 나서도 곧바로 수업을 듣는다고 전했다.

“아이들에게는 학교에 다닌다는 소속감과 심리적 안정감이 큰 것 같습니다. 병실에서 부모님만 접촉하다가 친구들이나 한 학년 위아래 선후배도 만나니까 더 좋아합니다. 국어나 미술, 독서시간에는 글이나 그림을 통해서 빨리 낫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이러한 활동들이 완쾌 의지를 끌어내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차마 부모님한테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이나 열망을 털어놓기도 하니까요.”

그녀의 등 뒤로 창문을 비집고 쏟아지던 오후 2시의 햇살이 마치 조명처럼 아이들 작품을 비춘다.‘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놀이동산입니다. 빨리 2차 항암치료 끝내고 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솜씨> 코너를 장식한 1학년 상우의 글이다. 옆에는 지난 미술시간에 만든 크리스마스 그림과 장식이 걸려있다. 눈밭을 달리는 산타와 익살스런 표정의 산타 등 동심 특유의 상상력과 즐거움이 가득하다. 어서 자라 개그맨이 되어 친구들을 웃기고 싶다는 글도 눈에 띈다.

앎은 곧 삶으로 이어진다고 했던가. 이 아이들이야 말로 배움이 삶에 물길을 대고 있었다. 앎과 삶이 이어가는 숭고한 순환, 그 중심에 아산 병원학교가 큰 산처럼 자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