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향기 사계절 체험… 방문자 줄이어 박인숙



‘옛날이야기’가 생태와 문화 속에 살아있는 마을
거칠 것 없이 하늘을 떠돌던 바람이 높은 산봉우리에 걸려 잠시 숨을 돌린다. 겨울 정기를 머금은 구름은 눈송이를 빚어 산자락 아래로 축복처럼 내려앉는다. 백두대간이 남서로 허리를 꺾는 길목에 우뚝 선 소백산 정상 비로봉(1,439m) 바로 아래 첫 마을, 충북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 2리 한드미 마을에서는 겨울바람을 타고 구수한 산촌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어머나, 쑥 향내가 가득하네! 이렇게 맛있는 군고구마는 난생 처음이야~.”
“아까 흙 덮을 때 삽질 많이 하신 분들, 이리 와서 김 쐬세요. 내일 아침에 못 알아볼 정도로 예뻐지진 마시고요, 하하.”
산촌마을 체험에 나선 건국대 환경과학과 대학원 학생들과 가족이 쑥 냄새 가득한 군고구마와 계란 맛에 흠뻑 빠졌다. 장작을 피운 흙구덩이 속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돌덩이를 볼 때만 해도 저게 뭐야? 싶었다. 한드미 마을 정문찬 회장(48)은 옛날 동네 어르신들이 불구덩이에 돌을 덥혀 대량으로 베 짜는 삼을 삶고, 그 열기로 옥수수며 감자를 구워 주셨다면서 ‘삼굿 구이’를 해 보인다.

먼저 작은 옆 구덩이에 고구마와 계란을 넣고 쑥을 얹더니 조심스레 판자로 뚜껑을 만들고 흙을 덮는다. 불에 달궈진 돌덩이 위에도 두텁게 흙을 얹고는, 물을 부을 테니 김이 새나오는 곳에 재빨리 흙을 덮으란다. 모두들 삽을 들고 준비는 했지만 작은 구멍에 물을 붓자마자 쉭~ 쉬쉬식~ 앞이 안보일 만큼 솟아나는 증기에 놀라 우왕좌왕…. “저, 저기! 여기도~ 빨리!” 서툰 삽질로나마 흙덮기를 마친 얼굴들로 웃음이 번져나간다.

고구마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계곡 건너 동굴 탐험에 나섰다. 너나없이 손전등을 비춰가며 바위벽에 매달린 박쥐를 찾아본다. 까만 박쥐 배설물이 어떻게 흰색일까. 정 회장은 동굴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아직 모른다며 은근히 호기심을 부추긴다.

“내가 초등학생 때, 한 할아버지가 동굴을 통해 우리 마을로 와서 고무신을 팔았어요. 경상북도 풍기에서 왔다고 했죠. 청년 시절에 친구들과 동굴 깊이 들어가 봤어요. 명주실을 풀어가며 1km 쯤 갔는데, 물이 차오르니까 무서워서 더는 못 가겠더군요. 동굴 탐험가들도 왔었지요. 발에 허리에, 무슨 장비를 잔뜩 찼지만 우리만큼도 못 간 것 같아요. 여러분, 박쥐 잡아본 적 있어요? 수건에 돌멩이를 싸서 높이 던지면 박쥐가 먹을 건 줄 알고 달려들어 부리로 콱 물어요. 돌멩이 무게 때문에 땅에 떨어지는 찰나에 매미채로 탁, 덮치면 돼요.” 마을 구석구석을 돌 때마다 생생한 체험이 깃든 정 회장의 입담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따뜻한 모닥불 가에 둘러선 채 언 발을 녹이며 군고구마를 먹는 맛이란! 김명화 사무장(36)이 덜 탄 나뭇가지를 구멍 낸 깡통에 옮겨주자 아이들 몇이 신나게 쥐불놀이를 한다. 동그란 불 무늬가 까만 밤하늘에 푸른 별들과 새겨내는 그림이 어떤 채색화보다 아름답다.



산과 들, 동굴과 계곡이 어우러진 마을 41가구 80명의 주민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한드미는 전형적인 산골이다. 소백산에서 흘러나온 계곡에는 산천어와 버들치가 노닐고, 500년 넘은 느티나무가 너른 품을 펼치는 마을에서는 40년 전만해도 350여 명이 시끌벅적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비탈진 산자락에서 짓는 농사라야 콩이며 율무 같은 잡곡과 고추가 고작. 여느 농촌처럼 산업화 물결에 밀려 가난과 문화적 소외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떠나가면서 마을은 쇠락을 거듭해 갔다.

한드미에 생기가 되살아난 것은 6년 전 부터다. 산과 들에 동굴과 계곡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과 주민들의 생활을 체험 프로그램으로 엮어 ‘사계절 체험 특화마을’ 운영을 시작한 것이다. 이어 정보화마을로 지정받아 초고속 인터넷통신망과 홈페이지를 구축해 농업 일지며 마을소식을 나누는 한편 홍보에도 활용하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한옥을 리모델링한 전통체험관에서는 장작불을 때 두부와 떡을 만드는 동시에 온돌을 덥혀 숙박시설로 활용하고, 마을회관에는 빔 프로젝터와 전동 스크린을 설치해 세미나도 할 수 있게 했다.

한드미의 사계절 체험은 참으로 다양하다. 봄이면 지저귀는 새소리 들으며 고사리와 취 등 나물을 캐면서 모종내기 같은 농사 체험도 한다. 어른들이 시원한 동굴을 찾아드는 여름이면 아이들은 뗏목 만들어 계곡물에 띄우며 풍덩거리고, 가을이면 농작물 수확과 함께 버섯이며 감을 딴다. 새총 만들어 새잡이에 나서고 새끼도 꼬는 겨울까지, 책에서 보던 옛날이야기가 지금도 한드미의 생태와 문화에 고스란히 살아있다. 뿐인가, 할머니들의 솜씨로 수수부꾸미며 메밀부침 같은 진미도 제공하니 체험객들 호응이 높다.

지난 여름철에만 7,000명이 다녀간 마을의 청소와 음식 만들기, 불 때기 같은 일은 부녀회와 청년회 노인회가 조를 짜서 맡는다. 체험객들이 지불한 숙박비와 식사비 등은 각각의 일을 맡은 조의 수입이 되고, 10%는 공동경비로 떼 사무실 운영에 쓴다. 도농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2006년 봄부터 가을까지 가구당 350여 만원의 농외소득을 올렸고, 아토피 치료차 이사 온 집까지 6가구가 귀농했다. 덕분에 유치원생 8명에 초등학생이 14명에 이르는 등 아이들도 차츰 늘어나 마을에 생동감이 넘친다.



정문찬 회장도 학교 졸업 뒤 고향을 떠나 부산 등지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귀농했다. 정부에서 농자금 지원을 받은 사람이 농촌사업 대신 할머니들에게 이잣돈 놓는 걸 보고 이래서야 되나 싶어 체험사업을 시작한, 한드미의 막내 농군. 그가 동네일에 앞장서는 한편으로 농림부와 산림청 등의 교육현장을 찾아다니며 자립마을 가꾸기에 동분서주하는 동안, 어르신들은 소리 없이 그의 밭을 돌봐준다.

한드미 마을 ‘전설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동굴은 <대망> <연개소문> 등 여러 드라마의 촬영 현장이 됐다. 지난해 5월에는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찾아와 마을체험을 하고, 이 곳 막걸리가 청와대 만찬에도 쓰일 만큼 입소문도 났다. 하지만 마을 어디에서도 이런 걸 알리는 간판은 찾아 볼 수 없다. 상업적인 홍보는 피하고 싶은가 보다.

“저희들은 옛날 모습 그대로 마을을 가꾸고자 합니다. 공동 빨래터 옆 물레방아는 썩은 나무를 보수하고 디딜방아도 다시 만들 거예요. 한 주민이 담쟁이 넝쿨로 덮인 연탄창고를 부순다기에 그냥 놔두게 하는 대신 다른 쪽으로 길을 내줬지요. 삼굿 구이도 돼지는 안 해요. 마을에서 현재 돼지를 치지 않으니까요. 학생이 50명 미만이면 폐교가 되고 맙니다. 마을 가꾸기와 학교 지키기 운동을 열심히 해서 어린이와 어른 모두 즐겁고 행복한 마을로 지켜가고 싶어요.”

주민들의 이런 의지와 노력과 희망을 잘 아는 건국대 환경과학과 김재현 교수(생명의 숲 사무처장)는 ‘1인 1촌 전문가’를 자원해 한드미의 장밋빛 미래를 뒷받침하고 있다. 삼성코닝정밀유리와 인근 시멘트 회사들도 자매결연을 맺고 대소사를 돕는다.

겨울의 진미는 추위와의 놀이 아닐까. 꽁꽁 언 논밭으로 썰매만 들고 나가면 그 미끌한 즐거움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다. 봄여름 내내 농작물을 키워낸 경사진 비얄밭은 소백산이 선물한 눈을 푸짐히 받아 최고의 눈썰매장으로 변한다. 엉덩이 밑에 비료 포대만 깔고 앉으면 준비는 끝. 발끝을 살짝 밀치자마자 사정없이 미끄러져내려 절로 와 ~ 아! 함성이 터진다. 자연과 사람이 엮어내는 저 싱그러운 행복이 한드미의 밝은 내일로 단장되기를 소망한다.

※ 한드미 마을 http://www.handemy.org (043) 422-8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