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연출가 김아라 씨와 '마가렛의 집' 소녀들 박현숙


소녀들의 눈빛은 내면의 투명함으로 빛이 났다. 은경(14세), 성령(14세), 진옥(14세), 미정(16세) 소담(16세). 다섯 소녀는 서울 성북동 동구여중에 다니면서 재개발지역의 소중한 방과후 공부방 ‘마가렛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들이다. 이제 막 초경의 문을 열었고, 우정이 목숨처럼 중요하며, 연예인에 관심이 많은 소녀들이 극단 ‘뛰다’의 초대를 받아 ‘하륵이야기’를 보러 대학로에 자리한 사다리소극장을 찾았다. 연극의 중심이라는 대학로가 지척인데도 아이들에게 연극은 아직 낯설기만 하다.

이들의 낯선 여행길에 연출가 김아라 씨(49세)가 길라잡이로 나섰다. 파격적인 실험과 모던한 연출 스타일로 우리 연극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온 김아라 씨는 ‘한국을 이끄는 100인’, ‘한국 연극을 이끄는 5인’에 꼽히며 세상의 주목을 받아왔다. ‘영화로 치면 감독’이라며 연출가를 소개하자 아이들은 탄성을 자아냈고, 배우 지망생인 진옥이와 성령이는 ‘이 참에 잘 보이라’는 친구들의 야무진 충고에 볼을 붉혔다. “아, 배우 지망생이 있었구나. 이거 반가운걸! 오늘 너희들과 함께 보려고 고른 이 연극은 나도 정말 기대된단다.” 환한 웃음을 나누며 소극장 안으로 옮기는 김아라 씨와 아이들의 발걸음이 즐겁다.

우리를 어깨춤 추게 하는 것은? 눈물짓게 하는 것은?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짧은 암전이 지나자 연극 ‘하륵이야기’의 막이 올랐다. 조각보로 만든 듯한 누더기 한복을 입은 익살스런 피에로가 등장하더니 한바탕 즐거운 놀이판을 벌인다. 곧이어 다섯 명의 악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악기가 얼른 눈길을 사로잡는다. 생수통, 선풍기, 빈병, 바가지, 놋쇠그릇…. 도저히 악기로 보아줄 수 없을 것 같은 버려진 물건들이 재활용 악기로 변신했고 악사들이 때리고 두드리고 흔들고 비비자 놀랍게도 흥겨운 음악이 만들어졌다. 거기에 피에로와 악사들의 춤사위가 맞춤하게 어우러진다. 객석에서는 “잘 한다”라는 추임새가 절로 나왔고 아이들도 덩달아 어깨춤을 들썩였다.

왁자한 퍼포먼스가 지난 뒤 “옛날 옛적에”라는 푸근한 대사가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깊은 산골 오두막에 단 둘이 외롭게 살던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무신령께 아이 점지를 빌었고 그들의 정성에 감복한 나무신령은 하륵이라는 아이를 주었다. 단 하륵에게는 금기가 있었으니 이슬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륵은 무럭무럭 자랐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행복에 겨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륵은 너무나 쌀밥이 먹고 싶어져서 떼를 썼고 마음 약한 노부모는 자식에게 그만 쌀밥을 주고 만다. 깨진 금기는 파국을 몰고 왔다. 하륵은 먹을수록 배가 고파져서 온 집안은 물론 세상을 다 삼키고 해와 달까지 먹어버린다. 이런 하륵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식의 뱃속에 들어가고 하륵은 비로소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여보,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륵의 배고픔을 줄여 줍시다.” 할아버지의 대사는 관객의 눈시울을 적신다. 거대한 하륵이 흘렸던 눈물은 바다가 되고 그의 몸은 산맥이 되고 들녘이 되었다. 땅과 바다에 조용히 귀 기울이면 들리는 정다운 소리들, 그것은 하륵의 몸속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다정한 노래이다.

쓰레기에서 음악을 퍼 올리고 풀 한포기와도 교감할 수 있다면!
소극장을 나온 일행의 얼굴에 연극의 감동이 부챗살처럼 환하게 펼쳐진다. “얘들아, 어땠어?” 호기심 어린 연출가의 질문에 아이들은 얼굴에 홍조를 띤다. “부모님 사랑이 참 소중하다고 느꼈어요.” 미정이의 소감에 친구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그렇지! 사랑은 아무리 위험하거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잖아. 부모의 사랑으로 자식은 바다가 되고 대륙이 되었잖니. 결국 이 세상을 이루는 커다란 힘은 사랑이라는 거지. 이 연극은 곳곳에 보물이 숨어있는 것 같아. 어떤 보물이 있는 것 같니?”

“재활용 악단의 음악이 참 좋았어요.” 연극의 매력에 빠진 듯한 소담이가 말했다. “참, 기발하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것에 사람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아주 특별해졌으니. 테이프 늘일 때 나는 소리로 공포를 표현한 것도 참 재미있지? 그런 점에서 지금 너희들이 하고 있는 액세서리도 너희들 손으로 만들어 보길 권한다. 우리는 모든 물건을 돈 주고 사는 걸로만 알고 있잖니. 그런데 돈이 아니고도 살 수 있는 게 많아. 상상력만 있다면! 예술가들은 흙 한 줌 풀 한 포기 하고도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너희들이 예술가의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사물을 만난다면 좀 더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단다. 그리고 배우들이 쓴 가면과 몸짓,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니? 북청 사자놀음과 안동 하회탈놀이의 전통적인 요소에서 따온 거야. 세계인이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것에 너희 같은 신세대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해.”

“선생님이 말씀해주시니까 많은 것들이 이해가 돼요! 연극이 새롭게 느껴져요!” 진옥이의 목소리가 얼굴만큼이나 상기됐다.

“연극은 앙상블이란다. 한편의 연극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으지. 그들이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은 거듭나는 거야. 내게는 그런 과정이 참 아름다운 세상으로 비친단다.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선물하는 것이 연극인의 마음일 거야.”

고 2때 연극의 환타지에 빠진 이래 지금까지 연극인의 길을 걸어오면서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는 연출가의 말에 다섯 친구들은 감동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글·박현숙(자유기고가) 사진·안홍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