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떠남을 주제로 한 사진과 콩트의 이중주 김하림



1...................탈출

밤 11시가 넘어서야 문 선생의 10번째 단행본 출판기념 파티가 끝났다. 집 방향이 같은 문 선생과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새로 시작할 연재만화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 선생은 불쑥 생각났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자네 윤 국장 알지?”
“윤 선배님 말씀이신가요?”
“음. 정 기자에겐 대선배가 되겠군.”
“예. 하지만 워낙 후배들에게 격의 없는 분이라 그냥 큰형님 같으신걸요. 이번 일도 윤 선배님께서 직접 제게 추천해 주셨어요. 덕분에 사회 초년생인 제가 선생님 담당을 맡게 되었죠.”
“능구렁이 같은 만화가에게 순진한 초보 기자를 붙여 놨다고 편집부에서 걱정들 꽤나 했겠군.”
“이것저것 사고치고 혼나느라 바빠서 그런 이야기 들을 겨를도 없었어요. 아, 문 선생님께서도 윤 선배님과 오랫동안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과 명콤비였다는 전설이 자자하던데요?”
“명콤비는 뭘. 능구렁이 같은 담당기자에게 내가 6년 반 동안 이리저리 휘둘린 꼴이었지! 하하.”
문 선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이나 웃는 얼굴로 창 밖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8년 전, 그 능구렁이가 아니었다면, 만화가로서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반 장난 삼아 참가한 만화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아 놓고 나니 무서울 게 없었어. 하지만 데뷔 후 처음 손을 대 보는 장편을, 게다가 연재까지 하려고 하니 막막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고. 스토리만 전담하는 작가와 함께 작업하라는 편집부의 권유도 자존심 때문에 허락할 수 없었고. 그것 때문에 윤 기자하고 꽤나 싸웠지. 그 사람 아예 출퇴근을 내 화실로 했었으니까. 어찌나 달달 볶아대던지….”
“윤 선배님도 혈기왕성하신 시절이 있으셨나 봐요?”
“혈기왕성하다마다! 결국엔 그 등쌀을 못 이겨 급기야 내가 도망을 쳐 버렸다니까?
잠시 바람 좀 쐬고 오겠다며 윤 기자를 안심시켜 놓고는 화실을 빠져 나온 뒤, 어딜 간 줄 알아? 그 길로 몇 푼 안 되는 돈을 찾아 들고서 무작정 비행기표를 사가지고 일본까지 가 버렸어, 일본! 하하. 제정신이 아니었지.”
“예에? 일본으로요?”
“응 도쿄로 갔지. 괜히 어설프게 부산 같은 곳으로 내려갔다가는 왠지 그 능구렁이한테 덜미를 잡힐 것 같았어. 윤 기자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으로 도망을 친다고 생각하니 왠지 통쾌하기까지 했다니까.”



2...................선택

“아이고! 연재를 시작해 놓고 대책없이 도망을 치시면 어떡해요.”
“에이,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어. 나름대로는 구상을 하러 떠난다는 목표가 있었으니까. 그냥 찰거머리 같은 윤 기자가 작업에 방해가 되니 도망을 쳤던 거라고.”
“하하, 핑계 아닙니까?”
“이 사람, 역시 기자라고 팔이 안으로 굽는군 그래? 허허. 아무튼, 아무 연고도 없는 도쿄에 도착하고 보니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어. 예쁘장한 상품들이며, 독특한 패션, 그리고 정적이지만 아기자기한 거리. 아이디어가 샘솟는 듯하더군.”
“그래서 성공적으로 구상을 마치고 귀국하셨나요?”
“아니. 더욱 더 꼬여 버렸지.”
“예에?”
“처음 하루 이틀 동안은 창작 에너지가 넘쳐났지. 메모지에, 전단지에, 하다못해 끄적거릴 종이가 없으면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국제전화로 내 핸드폰에 음성메시지를 이용해서 메모를 해댔으니까.”
“그랬는데요?”
“차츰 이국적인 풍경이 익숙해지니, 도쿄도 서울과 별반 다를 것 없는 그냥 도시가 되더군. 애써 찾은 해방감은 금세 외로움으로 변해 밀려들고,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 시간은 더없이 무료하고 답답해지기 시작했지. 자네 혹시 ‘잠수’라는 거 타 봤나?” “아, 아뇨.”
“이런 일 하는 사람들은 대게 느끼게 되는 크고 작은 잠적에 대한 충동인데, 일종의 도피지. ‘아, 떠나고 싶어!’ 라든지 ‘다 때려치우고 지금 이 상황에서만 떠난다면…!’라는 악마의 속삭임 같은 것 말이야.”
“에… 제가 보기엔, 그냥 책임 회피 같은데요?”
“음, 괜히 물어봤네. 아무튼 말이야, 잠수를 타게 되면 두 가지 중압감에 시달리게 돼. 의도야 어찌 됐건 - 잘 해보려는 막연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 ‘잡아먹은 시간만큼 더욱 결과물을 잘 뽑아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잠수의 시간이 누적되면 누적될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자괴감’이 바로 그것이지.” “네. 애당초 정상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어. 냉정하네 이 사람? 그래 맞아. 누가 뭐래도 그때 나는 비겁한 선택을 했던 거지. 아무리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그만큼 허비한 시간을 되돌리기엔 항상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어버렸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고 자위하면서 허우적대고 있었지만 발버둥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결과만이 되돌아왔지. 장소를 늪으로 선택하고 발버둥 쳤던 내게는, 돌아와야 했던 당연한 결과였던 거야. 닦달하는 입장에서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3...................길을 잃다, 헤매던 골목을 빠져나오다

알고 있다. 하지만, 담당 기자라는 책임의식에서였을까. 노련한 중견작가의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되겠다는 묘한 승부욕이 발동하여 모른 척 딱 잡아떼고 말았다. 난관에 직면했을 때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본능적 행위 아닌가. 물론 나 역시 수없이 느꼈었고, 크고 작게 저질렀었다. 처음 문 선생의 담당이 됐을 적에도, 그 부담감에 이틀간 전화기를 꺼놓고 결정을 미루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부상(浮上)하게 됐죠, 그 잠수함이?”
“응. 그 한국제 핵잠수함이 도쿄의 시부야 어느 깊숙한 뒷골목을 이주째 표류하고 있던 날이었어. 챙겨온 돈도 떨어져가고 잘 먹지도, 잠자리도 좋지 못했던 탓에 판단력까지 흐려져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지. 그것도 모자라 소나기까지 갑자기 퍼붓는 거야.”
“최악이었네요.”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멍하니 길바닥을 바라보고 있었지. 물에 젖어 어두워진 아스팔트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 나이 삼십에 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생각 없이, 계획없이 내 앞에 어지럽게 펼쳐졌던 선택의 순간들을 나는 힘들다는 이유로 그저 스치듯 도망쳐 왔던 거야.”

“예….” “비가 그치고 난 후에, 묘한 기분으로 정처 없이 발길을 옮겼는데 작은 공터가 나왔어. 여느 때였으면 호젓한 감상에 젖어 아기자기한 생각을 할 만한 아담한 공터였겠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더군. 그 작은 빈 공간은 내게 너무 크고, 너무 황량했어. 나를 집어 삼키지나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그 중압감에 나는 짜부라질 듯 작아지는 것 같았지.”
“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곳을 걸어 나오면서 생각을 정리했지. 그리고 헤매던 골목을 수월하게 벗어나 다시 시부야 역으로 나오게 되었어. 나는 그 아이디어를 잊어버리기 전에 일 분이라도 빨리 메모를 해야 했지. 그런데 내 호주머니 안엔 노트와 펜은 없고 동전들만 짤랑거리고 있었던 거야.”
“아, 그렇다면 음성 메시지 메모를!”
“그렇지! 나는 시부야 역 앞의 거대한 인파를 단숨에 뚫고, 서둘러 공중전화기로 달려갔어. 그리고 번호를 누르고 신호가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을 무척 초초하게 기다렸지. 그리고 음성메시지 센터에 연결이 됐어. 그런데!”
이런 식이다. 문 선생 특유의 ‘왕 감질나게 하는 스토리 전개 방식’. 8년 전 비 개인 시부야 역 공중전화기 앞에서 수화기를 들고 있던 풋내기 만화가로 돌아가 이야기를 하던 문 선생은 - 정말 실제로 자신의 핸드폰을 귀에 대고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 불쑥 나를 쳐다보며 말을 끊었다.



4...................함정

“예. 그런데요?”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어. ‘신규 메시지가 있습니다. 메시지를 확인하시려면 1번을 눌러 주십시오.’라고.”
“아.”
“짐작하지 않아도 그건 윤 기자가 남긴 메시지라는 걸 알 수 있었지. 멋진 스토리를 떠올리고는 신나서 전화통을 붙잡았던 나는, 잊었던 윤 기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아이디어고 뭐고 다시 간이 콩알만해졌어. 윤 기자는 그간 얼마나 곤란했을까? 그가 남긴 메시지는 대체 뭘까? 안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일까? 아니면 애타게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제발 나타나라는 애원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확인 버튼을 눌렀지.”
“협박이었나요?”
“아니. 하지만 애원도 아니었지. 내 예상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어! 윤 기자가 남긴 메시지는 이랬거든.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문 작가를 심하게 몰아붙였다. 직업상 어쩔 수 없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에 쫓겨 좋아하던 사람도 잃고 마는 이 현실이 너무도 싫다. 마침 가까운 친척이 도쿄에서 결혼을 한다고 하기에 그 핑계로 휴직계를 냈다. 한 두 달 도쿄에 머무르면서 여행을 할 것이다. 자기가 다시 서울로 돌아갔을 때, 웃으며 술 한 잔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이야! 끝에 ‘정말 보고 싶다.’고까지 했지.”
“으아.”



5...................일상으로

“움찔하고 놀라서 순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어. 시부야를 가득 메운 수많은 인파들. 그 사이로 정말 윤 기자가 걸어 다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어?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문 작가가 여기 웬일이야?’라며 내 등을 탁! 칠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난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어. 아직 난 아무것도 해 놓은 게 없었기 때문이지.”
“그래서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내가 김포공항 입국심사대 앞에 서 있는 거야. 전화를 끊자마자 당장 죽기 살기로 표를 구해서 일본을 떠났던 거지. 어떻게 짐을 꾸리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도 안나. 결국 고생도, 결심도, 느낀 바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렸지. 비참한 기분이 되서는 터덜터덜 입국장 문 밖으로 나오는데, 글쎄 거기에…!”
“설마 윤 국장님이?”
“그래! 득의 만만한 표정인 윤 기자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더라고. 어안이벙벙한 채로 서 있는데, 그 사람이 내 앞으로 척척 걸어오지 않겠어? 그리곤 내 어깨를 탁 치더니 웃으면서 한마디 하더군. ‘자, 바람도 쐬었으니 다시 시작해 볼까?’라고.”
“어떻게 된 거죠?”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거지. 베테랑인 윤 기자 정도면 나 같은 송사리급 잠수함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거라고. 모르는 척, 메시지를 남겨놓고 그걸 내가 듣게 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까지도 모두 계산하고 있었던 거지. 하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말 대단한 능구렁이야.”
“그럼 그 길로 다시 돌아가 작업을 하셨던 거군요?”
“그랬지. 나름대로 그 일로 느낀 바가 있어서, 게으름 피지 않고 열심히 작업을 했지.” “하하. 정말 모든 게 윤 선배님을 피해 일본으로 도망친 덕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문 작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이야기를 했다.



6...................떠남의 양면성

“분명, 나는 그 때 일본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떠났어. 하지만 떠남에는 양면성이 존재해서, 무언가를 버려야 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얻게 되지. 떠나 있는 동안 그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되는 거야. 그리고 결국 돌아왔을 때 무엇이 내게 남았는가의 문제인 거지. 버린 것에 대한 후회냐, 얻은 것에 대한 만족이냐…. 내가 다시 일본을 떠났을 때에도 처음처럼 빈 손이었어. 그렇다면 애당초 얻어올 게 없었다면 떠나지도 말았어야 할까? 아니면, 그저 떠났다는 자체가 중요했던 걸까?”
“마치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들리네요.”
“그래, 정 기자. 모든 크고 작은 떠남은 마치 인생의 축소판인 것 같지 않아?”

사진을 찍고 글을 쓴 김하림은 96년 가요계를 은퇴하고 현재 만화가와 디자이너로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