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떠나는 자 이유없다, 초보유럽잔혹사 남영숙

3월 17일 17:05 p.m., 승객들로 붐비는 아테네행 TG635에서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젠장, 봄이야. 봄이 오고 있군.’ 그리고 5월 30일, 여름이 되었다. 75일만의 일이었다.

귀국 경유지였던 방콕에서의 6일을 빼면, 유럽에서는 60여 일 남짓 떠돌았나 보다(원고 쓴다고 처음 계산해봤다). 한반도에서 처음 유럽 간 사람도 아니고, 여행정보가 흔한 세상에 아는 척하면서 거들먹거릴 생각도 없다. 그저 떠날 이유를 찾으면서 망설이는 사람들이 ‘그냥 지르는 데’ 희망의 증거가 되길 바란다.

그냥 질렀다
올해로 나는 서른이 되었다. 그리고 미혼에 백수다. 여행 경비는 알량한 퇴직금만으로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건 내 머릿속 생각일 뿐 어림도 없었다. 나이 많고 혼자에 학교 졸업한 지 오래됐다고 비행기삯부터 악조건이었다. 나는 모든 할인 조건 사이를 절묘하게 피해 다녔다.
식구들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한국산(産) 노숙자가 파리 에펠탑 밑에서 굶어죽었다는 BBC뉴스라도 보면 당신 딸, 누나라고 하기도 남사스러워서 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현명했다. “살아돌아오는 게 목표야”라고 오도방정을 떨던 녀석이 여행 막판엔 꽤 용감해져서 야간열차도 밥 먹듯이 탔으니깐. 까짓거 노숙쯤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빅맥이 만원쯤 하는 스톡홀름에선 정말 그러고 싶었다).

두 달 남짓 유럽의 주요 도시를 찍고 돌아다녔다. 그리스 아테네, 메테오라 - 이태리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 오스트리아 짤츠부르그, 비엔나 - 헝가리 부다페스트 - 체코 프라하 - 독일 뮌헨, 퓌센, 트리어, 프라이부르그, 함부르그 - 스위스 루체른, 인터라켄, 제네바 - 스페인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톨레도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파리, 몽생미셀, 베르사이유 - 노르웨이 오슬로, 베르겐 - 스웨덴 스톡홀름. 그리고 태국 방콕. 내 친구들 중에 가장 여권이 파란만장한(?) 강호승이 타이항공을 추천했다. 물가 싼 태국에 들러 해산물로 몸보신하며 시차적응이나 하다 오라는 거였다.



인간갱생 가능한가
유럽에 가서는 어땠냐면… 한마디로 심하게 춥고 외로웠다. 3월인데 추워봤자지 하곤 오만방자하게 패딩점퍼를 두고 왔는데 방콕 오기 며칠 전까지도 노르웨이에서 눈보라를 맞았으니 그간의 오한은 정말 눈물겹다. 뼈속까지 시려서 T셔츠를 서너 겹씩 입고 다녔다.
다음으로 외로운 문제. 그리스에선 첫날부터 우리나라 친구가 생겨서 원초적인 인간 사이의 갈등을 빼곤 외롭다는 생각은 끼여들 새가 없었다. 그런데 바다 건너 이태리에 들어서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온갖 자세로 연인들이 출몰하는데 참말로 가관이었다. 르네상스 낭만의 틈바구니에서 나홀로 지옥인 열흘이었다.
이런저런 문제에 광분하며 한국으로 편지를 써대기를 한 달, 하루에도 수시로 머릿속에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게 유치해졌다. 두 달 있다가 온댔는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돌아가냐는 단순한 결론이었다. 체념 끝에 평화가 왔다.

낯선 땅에서 다양한 사람과, 풍경과 만나고 헤어졌다. 하지만 그 중에서 단연 최고 & 최악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일상이 배제된 여행이란 조건은 나에게 나를 100% 노출시켰다. 숱한 삽질과 후회들이 내가 몰랐던 나, 알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던 나를 정면으로 들이밀었다. 눈을 감을 수도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널리고 널린 시간이 언제나 머릿속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잔혹한 전기(傳記)영화를 찍어대고 있었으니깐. 30년 인생이 ‘나’라는 최강의 독설가를 만나 30일 동안 재조립되고 있었다.



세상의 ABC를 새로 배웠다
신발 밑창에 구멍이 나면서 격랑은 고요해졌다. 무조건 걷고 보는 육체의 피로가 온몸 구석구석의 기름기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한번의 여행으로 완독하겠다던 만용도 드디어 던질 수 있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으니깐.
여행 경비를 댔으니 본전 생각이 날 만도 한데 다행히 식구들도 살아서만 돌아오라고 했다(4월초 로마에 있을 즈음엔 마드리드 테러 직후라 테르미니 역에서 매일 대 테러 모의훈련이 벌어졌다. 물론 나는 그 뉴스를 보며 오렌지를 까먹었다). 부담이 없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정직, 성실 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격언들의 힘을 믿게 되었다. 책상물림 지식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몸으로 겪으면서 처음 세상을 배우는 아이처럼 하나씩 하나씩 가슴으로 저장되었다. 나는 머리 대신 가슴으로 보고 느끼는 법을 조금씩 익혀나갔다.
여기에 의식주와 싸워가며 지낸 한 달이 기본적인 생활에 자신감을 갖게 했다. 오늘은 어디로 갈지, 어디에서 잘지, 무엇을 먹을지 같은 것들은 매순간 선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리집, 내 방, 친구들, 어머니가 해주는 밥 같은 건 없었다. 일상에선 당연했던 게 여행을 하면 하나도 당연하지가 않았다.




나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길 위의 나날들을 돌아보면, 한 10년의 인생을 압축해서 겪은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그 75일을 다 얘기할 순 없을 것이다(이렇게 서두를 꺼내는 데도 4페이지나 썼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 마음의 다락방처럼 나만 아껴보려고 숨긴, 미안하다, 비밀까지 치면 어떡하나?)

떠날 무렵 나는 대학교 입학 이후로의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며 허무함에 치를 떨었는데 마이너스 10년에 플러스 10년을 보태니 이제 다시 시작이다. 그리고 이 여행을 대단한 경험으로 만드는 건 이제부터다. 길 위에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 내가 보이지 않았던 것처럼.

유럽 간다고 공언한 지 10년만에 다녀왔다. 10년이든 30년이든 잊지만 않으면 꿈은 언제든지 현실로 변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들의 말은 잊어라. 내 얘기도 잊어라. (도와주려는 생각이었겠지만) 당신이 겪을 때까진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이 직접 겪고 당신만의 말을 만들어라. 그리고 누군가 나처럼 잘난 체할 때 슬쩍 미소 지어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은 남영숙은 아산장학생 출신이며 본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