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놀이,일상으로부터 찾는 신비, 문화기획자 안이영노 반칠환



일(노동)이 삶을 유지시켜 주는 소중한 바탕임은 분명하지만, 삶 전체가 오로지 저 소중한 엄숙함만으로 유지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숨막히게 경건할 것인가?
대개 일은 삶을 유지시켜 주지만 고통스럽고, 놀이는 쾌락과 즐거움을 안겨 주지만 빵과는 거리가 멀다. 삶에서 오로지 일만 남는다면 고통을 해소할 길이 없을 것이요, 놀이만 남는다면 생존이 위협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일과 놀이는 어떤 황금 비율로 만나야 생존과 즐거움을 아름답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놀이’의 달인
‘일’과 ‘놀이’에 대한 관념이 획기적으로 변화하는 길목에 우리가 서 있다. 시간적으로는 주 5일제가 도입되고 공간적으로는 고속철도의 시대가 도래함으로 인하여, 여유 시간은 늘고 누빌 공간은 한층 가까워졌다. ‘일 중심’의 무거운 가치관에서 ‘놀이’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잘 놀 것인가?’를 물으러 ‘놀이’의 달인을 찾아 나섰다.
안이영노(38세). 문화 비평가, 문화 게릴라, 문화 기획자, 문화 교육자 등의 다채로운 수식어를 얻으며 활발하게 놀이활동(문화운동)의 중심부를 관통해 온 그이를 만나러 용산에 자리잡은 외진 사무실을 찾았다. 무의식중에 ‘노는 것’과 ‘허랑방탕함’을 동일시해 온 나의 선입견과는 달리, 작지만 몸집이 단단하고 태도가 너무 단정해 보이는 한 사내를 만나고 다소 실망했으나, 곧 더 큰 호기심에 사로잡혔다. 나의 호기심과 사전 정보의 취약함을 눈치챈 듯 그이가 입을 열었다.
“먼저 저를 소개해야겠네요. 남들 한창 일할 때 저는 한 십 년 간 지겹게 놀았습니다. 저는 대학원을 다니던 1990년대 초반, 신세대 논쟁이 활발했을 때에 그 대변자 역할을 맡았습니다. 문화 평론을 하면서 상투적인 노동 세계보다 문화 게릴라들의 라이프 스타일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이는 과감히 그것을 뿌리쳤다. ‘노동’보다 ‘놀이’의 가치를 주장하며 문화 게릴라의 선봉에 섰다. 유학의 기회도 뿌리쳤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를 자처하며 살았다. 그이는 1990년대를 뜨겁게 달군 대안(Alternative) 문화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부상했다.

놀이면서 일인 것
‘문화 게릴라’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직업을 갖기도 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라는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다. 낮에는 그곳에서 일하고 밤에는 홍대 앞 이벤트 카페로 출근하는 이중 생활을 즐겼다.
시민단체에서 3년 반쯤 일을 할 때였다. ‘시민단체가 우리 사회의 행복한 일을 찾는 것이라면, 나 자신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자’고 결심한다.
“결론은 더 날라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서른한 살 때, 시민단체에서 나와서 드럼을 치다가 록 밴드(허벅지 밴드)를 시작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미쳤느냐고 했습니다. 서른 살 넘으면 취직하기 어렵다 했는데 나는 듣지 않았습니다. 록 밴드가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미치도록 재미있었습니다. 음반을 3집까지 내고 나니까 더 유명해지고 싶어지면서 과부하가 걸리더군요.”
록 밴드를 한 지 다시 3년 반쯤 지났을 때, IMF 이후 벤처 기업들이 들쑥날쑥하고 축제 바람이 터지자 그이는 다시 축제 기획자로 살았다. 이것도 매우 재미있었는데 점차 ‘일이 되어버렸’단다. 이것도 3년 반쯤 하다가 그만두고 잠깐 동안의 휴식을 거쳐 큐엑스라는 이름의 이 회사를 차린 지 6개월쯤 되었다.
“여기서 현대인의 ‘놀이 테크’를 개발하는 것이 제 일입니다. 축제와 놀이 등 제 경험을 잘 버무려서 문화 상품을 만드는 것입니다.”
“일과 놀이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떻게 보십니까?”
“‘놀이냐, 일이냐’는 십년 전 패러다임입니다. 이제는 놀이면서 일인 것을 찾아야 합니다. 최고의 상태는 일인지 놀이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처음 어떤 일을 기획하고 발상할 때가 바로 그 때인데 조금 가다 보면 주위로부터 요구 사항이 생기고, 놀이가 짐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일로부터 지치거나 소외되어 가지요. 이 때에 ‘내가 진정 이 일과 제대로 결혼을 한 것인가? 초심이 잘 유지되고 있는가?’ 반성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일상 속 숨 틔우기
그이는 요즈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취미와 놀이를 찾아 주는 ‘일상 속 숨 틔우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과 놀이의 구분보다 이제는 일상에서 신비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물론 일탈 속에서 노는 법도 있지만 각자가 처한 영역에서 놀이를 찾아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일상에서 신비를 찾는 일’이라, 참으로 매혹적인 말이 틀림없지만, 만약 찾지 못한다면? 지리한 일상의 굴레에 꼼짝없이 덜미를 잡힐 것이 아닌가? 자칫하면 달아날 곳도 없는 것 아닌가? 하긴 일로부터 달아나서는 놀 수가 없다. 일을 즐겨야 일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도 깨달은 바 있지만, 그게 생각처럼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잘 놀 수 있겠습니까?”
“먼저 사회가 구조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기업은 사람을 물질 대접하지 말고 여가의 생산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정부도 복지 인프라를 깔아 주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휴식이라는 게 돈이 드는 것이거든요. 또 놀이보다 경쟁과 일이 지배적인 우리 모두의 의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노력도 필요하지요. 힘들어도 직장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늘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가 필요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일러주신다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찾으십시오. 이를테면 난초를 가꾼다든지, 산책을 한다든지, 도서관을 간다든지 하는 일들입니다. 자기한테 에너지와 신비를 주는 일을 가지십시오. 또 일하지 않는 시간 계획을 창조적으로 짜다 보면 저절로 일하는 시간이 보람있게 되기도 합니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노는 데도 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좀더 효과적으로 노는 방법을 연구하고 조사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즐거움이 배가됩니다. 노는 시간이 따로 있다는 고정관념도 버리십시오. 놀자면 시간과 돈과 맘에 맞는 친구부터 떠올리는데, 그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늘 습관적으로 하는 일을 바꿔서 숨통 트기를 시도해 보십시오.”

모든 삶에 생명을 주는 것
나는 어느 새 저이와 대화를 나누는 꽤 오랜 동안 ‘놀인지 일인지 모르면서’ 노트에 받아 적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이가 하는 말이 귀에 걸렸다.
“놀이는 모든 삶에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우선 자기가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며, 자기 이외의 존재에게까지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놀이로부터 시작한 저이는 이제 세상 사람들에게 ‘잘 노는 법’을 전파하러 나서고 있었다. 저이는 자신을 ‘놀기에는 너무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한다. 자칫 저이가 ‘남에게 잘 노는 일을 권하는 일중독증’에 걸릴지 걱정이지만, 어서 저이의 ‘노는 법’이 세상에 명약이 되어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수혜자가 되기를 바래어 보는 것이다. 밖으로는 경쟁보다 공동체의 가치가 중시되고, 안으로는 저마다 ‘일과 놀이의 경계’가 없어지는 날, 그 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노동 해방의 날이 아닐까.

글쓴이 반칠환은 시인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서라벌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누나야'등이 있으며, 장편동화 '하늘 궁전의 비밀'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