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힙합으로 듣는 10대들 세상 김종휘



교실 이데아와 전사의 후예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4년 ‘교실 이데아’에서 성난 청소년들의 울분을 터뜨리며 “됐어 이젠 됐어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소리치며 다가왔다. 안방에서 시청하는 어른들에게 그렇게 대놓고 노래했으니 파급은 엄청났다.
이처럼 힙합은 텔레비전에 나타날 때부터 이 사회의 부조리와 억압에 대한 십대 청소년들의 분노와 반발을 직접적으로 대표하게 되었다. 서태지의 은퇴 이후 가요계는 10대 댄스그룹들이 주도하며 소녀풍 감상과 캐릭터 소비 상품으로 흘러갔지만, 힙합 장르를 차용할 경우에는 여전히 서태지 시절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 만한 가사를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H.O.T가 1996년에 발표한 ‘전사의 후예’다. “아 니가 니가 뭔데 도대체 나를 때려 왜 그래 니가 뭔데”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학원 폭력 피해자의 억울함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교실 이데아’가 학교 체제에 대해 정면으로 “됐어”라고 반박하는 탈 학교체제 선언이라면, ‘전사의 후예’는 착한 학생과 못된 학생의 이유 모를 대립을 한탄하고 있는 한 학생의 개인적인 하소연이다.

힙합 문화 지도
어쨌든 인식 수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회 문제를 언급하던 힙합 가사의 이런 특징은 1998년 g.o.d와 함께 변화를 겪는다. 이들의 데뷔 타이틀곡 ‘어머니’는 “어머니 보고 싶어요”로 시작해서 애잔한 읊조림과 멜로디를 반복하다가 “사랑해요 이제 편히 쉬어요 내가 없는 세상에서 영원토록”이라고 끝을 맺는다. 반발과 분노 대신 고생하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힙합 가사의 전면에 등장한 셈이니 큰 변화다.
물론 1999년엔 “영화에선 막 십새끼 좆까 막 그러던데 노래에선 좆됐다 하는 것도 안 된다”고 비꼬는 조PD의 ‘Break Free’도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 무렵이면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주류 힙합의 가사들은 g.o.d의 노래처럼 남녀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신파조의 과대 포장된 비극적인 이야기를 많이 다루었다. 반면 조PD 같은 언더그라운드 이미지의 힙합 가사들은 더욱 거칠고 직설적으로 세상을 조롱하는 쪽으로 치우쳤다.

이후 2000년을 넘어오면서 현재까지 주류 힙합의 가사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갈래의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 하나는 드렁큰 타이거의 ‘남자기 때문에’처럼 “절대로 울지 않아 난 남자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마초적 정서를 바탕에 깐 가사들이다. 또 하나는 싸이의 데뷔곡 ‘새’에서 “당신 너무나 이쁜 당신 항상 난 당신을 향해 행진”이라고 말하듯 나이트 클럽의 부킹 장면을 연상시키는 유희적 가사들이다. 마지막 하나는 앞에서 보았듯 g.o.d처럼 귀엽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가사들이다.
물론 한국 힙합의 문화 지도는 이보다 매우 복잡하고, 특히 힙합 가수들 내부에서 정통성과 오리지널을 따지는 문화적 분위기가 많아서 가사들도 그렇게 계보를 그려가며 매우 다양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중에는 개인의 철학적 실존을 다루는 가사도 있고, 세태 풍자의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가사도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텔레비전에 많이 노출된 대중화된 힙합 가수들의 경우로 논의를 국한했다.
이런 한계가 있지만 지극히 스타 시스템에 의해 기획되어 등장하는 대중 가수의 힙합조차 나름의 시대적 분위기와 당대 청소년들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가사를 통해 그런 흔적의 일부를 읽을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지난 10년 동안 힙합 가사에 담긴 변화의 흐름을 추적하다 보면 1994년부터 2004년에 이르는 시기의 젊은 세대가 어떤 의식과 취향을 갖고 살아왔는지 느낄 수 있다.

시의 현대적 부활?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힙합이 가사의 높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끝없이 중얼거리며 비트를 타야 하는 음악 형식에 깃든 것이므로, 힙합 가사를 그런 독특한 음악 형식과 분리해서 분석하는 일이 지극히 일면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심한 욕설도 힙합으로 들을 땐 애교 섞인 농담으로 들릴 수도 있고, 글로 쓰여진 욕설보다 더한 불쾌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요컨대 힙합은 특정한 음율을 따라 말로 하고 듣는 시(詩)다. 시가 활자로 쓰여서 읽히기 전에 입에서 귀로 들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사람들은 시를 대하는 태도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힙합은 한편으로는 시의 현대적 부활로 추앙받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엄청난 빠르기 때문에 세대간 단절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어쨌거나 각 개인으로 돌아가선 자기 느끼는 대로 반응하고 사랑할 일이다.

글쓴이 김종휘는 문화평론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