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흰머리와 악수하기 공선옥



아,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지금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열흘 붉은 꽃 없다 하듯이 바뀌는 계절 앞에 그토록 은성했던 나뭇잎들도 속절없이 거름이 되는 계절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특히, 봄 여름 가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 무렵이면 계절이 바뀌는구나, 하는 느낌보다, 아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하는 생각부터 먼저 들기 시작한 때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느날 아침, 거울을 보다가 눈가에 잡힌 주름을 ‘발견’한 날 이후부터일까요. 아니면 그 며칠 전 머리를 빗다가 툭 떨어지는 흰머리를 보고나서부터일까요.

머리를 빗고 나면 늘 그랬듯이, 떨어져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습니다. 그런데 손에 잡힌 것은 검은머리가 아니라 흰머리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내 머리카락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내 머리에서 흰머리가 나오다니. 그러다가 거울을 들여다 봤습니다. 나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지요. 그것은 바로 내 머리카락이 틀림없었기 때문입니다. 흰 머리카락은 그렇다쳐도 내가 왜 흰 머리카락 때문에 놀라고 있는지….
그 다음에 내가 놀란 것은 바로 흰 머리카락 때문에 놀라고 있는 나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평소에 내 지론이 늙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었는데, 나 자신의 늙음을 받아들일 준비는 아직 안 되었던가 봅니다. 아, 이제 나도 어떻게 나이 먹어갈 것인가를 생각할 때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나이 먹어갈 것인가란,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일맥상통하는 말이 되겠지요. 또 그것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러니까 내 죽음은 어떤 죽음이어야 할 것인가와 같은 것이 됩니다.

겨울다운 겨울은 아름답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세상은 이제나 저제나 ‘젊음의 찬가’로 넘쳐납니다. 나이 먹을수록 젊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얼마전 텔레비전을 보는데 환갑이 넘은 부부가 젊은 아들 내외보다 더 젊은 치장을 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방영되더군요. 꼭 끼는 청바지와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 그 방송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이 먹어도 젊게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는 솔직히 그 부부 모습을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화장을 안 해도 예쁜 나이인 어린 아이가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을 볼 때도 민망해지듯이, 나이 먹은 사람이 지나치게 젊은 사람 흉내 내는 것도 거부감이 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 요새 세상은 당대 사람들로 하여금 제 나이로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잘 내야 칭찬받고 노인이 젊은 사람 흉내내야 칭송 듣는 사회가 아닌가, 여겨져서 씁쓸해지더군요.
그러나 단언하건대, 제 나이를 제 나이로 못 사는 사람은 이후에도 절대로 제대로 된 인생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 나이를 제 나이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전의 나이를 아름답게 보내고 이후의 나이를 흔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봄이면 싹 트고 여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고 겨울이면 그 열매 다 내어주는 것, 일점 망설임없이, 후회없이 내어주는 것, 그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완벽하게 비워내야 다음에 채울 것이 있고 채웠으면 비우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아이고 어른이고 모든 사람들이 어느 특정한 나이대, 엄밀히 따지면 이십대의 나이에 있는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강요하는 시대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진정한 아이도, 진정한 어른도 없는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제 나이를 제 나이대로, 제 나이답게 살지 못하여,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든 사람들이 봄도 가을도 겨울도 없이 여름으로만 살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닌지.

흰머리와 악수하세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놈이 제 짝꿍이 ‘커플링’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무엇이다냐, 했더니, 애인들끼리 하는 반진가, 귀거린가, 하는 거라더군요. 초등학교 아이 입에서 커플링이니, 애인이니, 하는 말이 톡톡 잘도 튀어 나옵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남자 역할, 여자 역할 정해 놓는 것이 부당하듯이, 십대는 십대로, 이십대는 이십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우스운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십대도 삼십대도 육십대도 모두 이십대처럼 살아가는 것을 부추기는 현상이겠지요. 아이가 어른 흉내 내고 노인이 젊은 흉내 내는 것이 나는 솔직히 좀 ‘징그럽’습니다. 그러나 징그러운 것으로 따지자면, 아이가 어른 흉내 내고 노인이 젊은이 흉내 내는 것을 칭송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 분위기가 정말 징그럽습니다.
바야흐로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노인들의 시대라고 합니다. 고령 인구가 인구의 삼분의 일은 될 거라고 합니다. 이왕지사 시대도 고령화 시대로 접어드는데, 이제 우리 사회 사람들이 ‘젊음의 찬가’만을 부르는 시대와 이별했으면 좋겠습니다. 늙음의 미학까지를 들먹이진 않더라도 적어도 나이듦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젊음과 이별하기란 바로 아름다운 늙음을 준비하는 새로운 시작이 되겠지요. 아름다운 늙음이란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되며, 아름다운 죽음이란 또 아름다운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운 순환고리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의 시작은 바로 어느날 거울 속에 드러난 흰머리와도 흔쾌하게 악수하는 것이 되겠지요.

글쓴이 공선옥은 소설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