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나는 나의 시초요, 만인의 족보 반칠환


나뭇잎들이 우수수, 여름내 붙잡고 있던 나뭇가지를 놓아버린다. 상수리나무들이 투두둑, 머리통 굵도록 움켜쥐고 있던 도토리들을 떨구어 버린다. 들판엔 곡식들 그루터기만 남고, 살진 가을 뱀들 보이지 않는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인가? 아니다. 가지와 헤어진 잎들은 다른 잎들과 만나 뒹굴고, 깍정이를 벗어난 도토리는 보드라운 흙 가슴과 만나고, 가을 뱀은 여름내 빈 동굴과 만난다. 만남과 헤어짐은 꼬리를 문 뱀처럼 연달아 이어지는 일상의 풍경인즉, 삶의 비의가 저기에 숨어 있음직하다. 생이 참된 만남과 참된 헤어짐으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선망의 경지이겠는가?
비의를 물으러 시인을 만나러 간다.

만인보
시인 고은(高銀). 마포의 한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저이는 사진 기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꼿꼿한 허리, 군살 없는 몸매, 우수가 깃든 표정, 고희의 나이에도 그림이 된다. 찰칵, 찰칵. 호텔에서는 무료로 배경만 취하고, 시인의 흡연이 용이한 자리로 옮기기로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조용한 커피숍을 찾아 나섰다.
“근황이 어떠신지?”
“막 만인보 다섯 권을 2차 교정 봐서 넘겼습니다.”
그렇지, 만인보(萬人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사람을 노래한 연작시로 꼽히는 저것은 1986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작업이다. 유년부터 현재까지, 현실과 역사 속을 넘나들며 만났던 인물들을 시로 다루고 있다. 그러고 보니 만인보야말로 다른 텍스트와 비할 바 없는 ‘만남’의 소재이자 주제가 아닌가? 만인보는 이번 다섯 권을 더하면 총 20권째이며, 앞으로 열 권을 더해 완성할 예정이라 한다. 의외로 조용한 커피숍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시끄러운’ 커피숍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허름한 쭈꾸미집에 들러 불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자릿세용’으로 약간의 쭈꾸미를 시켰다. 그이는 인터뷰가 끝난 다음 미 하버드 대학에서 온 손님들과의 만찬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이 매혹적인 식사를 삼가야 했다.

만남 - 세계는 고아가 없습니다
“오늘의 주제가 ‘만남과 헤어짐’인 줄 알고 계시죠?”
“듣긴 들은 것 같은데 잊어버렸습니다.”
주제를 잊어버렸다니? 할 수 없다. 즉흥 대답이라도 얻는 수밖에.
“세상살이는 모두 만남에서 시작해서 헤어짐으로 끝납니다. 연애도, 싸움도, 정치도, 장사도, 문학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만남과 헤어짐의 의미를 듣고 싶습니다.”
“어떤 생애를 한두 마디로 말할 수 있다면, 태어나서 만나고 죽는 겁니다. 생의 내용 자체가 만남이지요. 하나의 만남이 끊임없이 다른 만남을 이어 줍니다. 자기와도 만나고 예상할 수 없는 타자와도 만납니다.”
일단 입이 열리자 유장한 시냇물이다.
“존재라는 것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하나의 존재란 혼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컵 속의 물이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까? 만남이 운명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사물의 만남, 상황과의 만남. 시간(時間)의 ‘사이 간(間)’자도 만남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人間)도 만남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사람 인(人)자는 둘이 의지하고 있는 형국 아닙니까? 존재는 의지하고 있는 것, 그런 점에서 세계는 고아가 없습니다.” 종일 입이 심심했던지 쭈꾸미를 가져온 아주머니가 말참견을 한다.
“왜, 마음의 고아라는 게 있잖아요?”
“하하, 고것도 실상은 고아가 아닙니다. 고독도 친굽니다. 아주 소중한 친구지요.”
주인 아주머니가 시인을 못 알아보는 것 같아 소개를 하려니 저이가 가로막는다. “내가 누군 줄 압니까? 내가 누구냐면 저 한강 임진강 만나는 데 물귀신이요.”

헤어짐 - 민들레 꽃씨가 흩어져 더 너른 꽃밭이 됩니다
아주머니가 가져온 말랑한 쭈꾸미가 뜨거운 불판을 만나 오그라드는 동안 시인과 쭈꾸미집 아주머니의 수작에 달콤한 양념이 배기 시작했지만 나는 또 ‘이별’에 대해 물어 보아야 했다.
“나는 이별을 ‘자아의 확대’라고 부릅니다. 이별은 둘이 있다가 영영 못 만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만난 것이 확대되는 겁니다. 민들레 꽃씨가 흩어져 더 너른 꽃밭이 되는 것처럼요. 개인에게는 사별 다음으로 아픈 것이 이별입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곧 삶이지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고대 불교, 노장 철학, 샤머니즘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별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서툴러요. 도장 찍고 이혼을 하면 곧잘 적(敵)이 되잖아요? 다른 데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고,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게 바로 종말이 되곤 합니다.”
“이별에 익숙치 않은 원인이라도?”
“조선 성리학의 당파나 배타주의가 이별의 가치를 부정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지나친 편가름, 당파성이 너와 나를 적으로 만들고 아주 헤어지는 것처럼 벽을 쌓게 되었지요.”

시인의 만남
시인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 있는 만남으로 꼽는 것은 무얼까.
“나는 나의 시대와 만난 게 가장 절실합니다. 내가 태어난 때는 조국이 없는 상태였고, 또 모국어도 금지된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밥 굶는 사람이 적어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굶었지요. 밥 한 그릇이 얼마나 무서운가, 찬 물 한 그릇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그 시대로부터 배웠습니다. 식민지시대로부터 6.25, 4.19, 5.16, 가까이 광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격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 시대의 자식입니다. 시대가 나를 낳아 줬고, 나는 시대를 품고 살아 왔습니다. 비록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조국과의 만남은 제가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숙명적인 만남입니다.”
“진정한 만남이란 어떤 것일까요.”
“나는 교사, 은사, 교조를 싫어합니다. 자기가 실체가 되어서 만나야 진정한 만남이지 제자가 되어서 만나는 것은 딱한 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임에도 전혀 다른 것을 추구했습니다. 동양에서는 스승의 흉내를 내고 스승의 뼉다구를 호주머니에 모셔 왔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달라야 합니다. 나는 ‘나의 시초요, 나를 만든 자요, 우주에서 오만한 존재’가 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나이니까요. 물론 나는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겸손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호모순이 아닙니다.”

만남의 정신
주제를 잊어버렸다던 저이는 그럴 만도 해 보였다. 문학과 생애 자체가 누구보다도 깊게 ‘만남’의 정신에 밀착되어 있었으니. 생이 답(答)인 자가 굳이 화두를 기억하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나는 온몸으로 시대와 만난 저이의 행보가 부러웠으나 저이는 또 대롱 속 하늘 보는 자들의 삶 또한 소중하다고 위무한다.
“만남의 외연이 크거나 작은 것 사이의 차별은 없습니다. 제비집은 제비 한 마리나 두 마리가 들어가서 사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창공을 향해 날아오를 때에는 엄청난 만남의 공간적 확장이 이루어집니다. 때때로 내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처절하게 외부로 나가서 자기를 전소시켜 버리고, 제법무아(諸法無我)까지 가는 것이 만남을 삶의 내용으로 하는 존재 형식입니다.”

철드는 게 바보야
만남을 이야기하는 데 뜬금 없이 ‘눈물’ 생각이 나는 건 왜일까. 한때 저이는 달빛만 보아도 울던 울보로 유명하다. 울음이란 왜 나오는가? 대상과 상황과의 만남이 일치되었을 때 솟구쳐나오는 것이 아닐까? 달팽이가 빈틈없이 배를 밀고 사금파리 땅을 건너듯 대상의 아픔과 최고조의 만남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이 울음이요, 시가 아닌가? 요즘 눈물샘의 안위를 묻자 그이가 말한다.
“철드는 게 바보야. 그건 시의 역적이지.”
꽃을 꺾으러 봄 속으로, 잎을 만지러 여름 속으로, 열매를 주우러 가을 속으로 달려가는 이는 언제나 철든 노인이 아니라 철부지 소년이다. 나는 고희(古稀)가 믿기지 않는 저이의 얼굴에서 생의(生意)로 가득찬 철부지를 읽는다. 시인은 늘 새롭게 만나는 자이고, 철들 새가 없다. 그러니 꽃이여 다시 피거라.

글쓴이 반칠환은 시인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대산문화재단에서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를 받았고, 서라벌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