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평범이 좋더라 비범이 좋더라 방성철 外



일상의 슈퍼맨
나는 평범한 부모님 슬하에서 자란 평범한 사람이며, 평범한 것을 선호하는 성격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비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보다 좀더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하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그런 바람은 어렸을 적에도 있었다. 어른이 되면 슈퍼맨과 같은 영웅이 되어 악당을 물리쳐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황당한 바람에서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 과학자, 대통령, 의사 등과 같은 좀더 현실적인 바람으로 변한다.
우리의 부모님들을 보면 당신들은 우리들이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에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며, 우리들이 비범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정작 당사자들보다 원하시는 것 같다. 우리는 스스로 삶의 목표를 정할 수 있기 전까지 부모님에 의해서 소위 말하는 영재교육이라는 것을 받으면서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TV나 신문, 책으로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어느 영재 아이의 부모님은 그 아이를 평범하게 다른 아이들과 같이 평범하게 키우기 위해 일반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고 한 뉴스를 접한 기억이 있을 것이며,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현재의 삶이 불만스럽고 힘들 때, 그리고 좀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게 될 때 더욱 강해지는 것 같다.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사람들과 평범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비범 또는 특별하다는 것은 어렸을 적 꾸었던 황당한 꿈이나 살아가면서 찾게 되는 삶의 목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비범한 사람들은 타인이 보기에는 평범한 삶 안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방성철/30대/연구원

조물주의 뜻?!
사람들은 흔히 ‘누구는 평범하다’는 말을 한다. 평범하다는 것은 대상이 되는 사람이 그가 속한 집단내의 사람들과 상당 부분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며, 그 집단의 범주 특성과 기대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다분히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 대상자가 다른 범주를 가진 집단에 들어가면 이 새로운 집단 속의 사람들은 그를 평범하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나와 공통적인 특성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는 나의 평범함이 좋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평범하다고 말해주는 그들이 좋다. 비슷한, 혹은 같은 조건과 환경 및 생각을 가진 이들과의 그 든든한 공통의 분모 위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한 연대감과 동질감, 그리고 소속감이 ‘평범한 나’로서의 생활과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이러한 일상적이고 익숙한 안정감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삶은 종종 예기치 못한 상황과 기대와 다른 상태들을 불쑥 끼워 넣거나 툭툭 던져놓기 일쑤다. 이럴 때 사람들은 그들의 평범함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발견 혹은 생성되는 것을 얻게 된다. 그것을 나는 비범함이라 부르고 싶다.
무미건조한 생활 속에서 혹은 낯익은 집단의 안팎에서 삶이 던져주는 상황들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 해결해가면서 색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나의 비범함이 좋다. 남들과 다른 ‘비범한 나’로서의 해석법을 갖는 삶은 매력적이다. 이것이 내게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음을 고려해 보면, 절대적으로 평범한 사람도, 온전히 비범한 사람도 없다. 분명 모든 이들은 자신의 삶 속에 평범함과 비범함을 함께 조화시켜 담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지구상의 단 한 사람도 나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이 조물주의 뜻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박성정/20대/홍익대 입학예정

비범의 두 얼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과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평적이라면 비범한 사람들은 수직적이고 돌출적이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비범함으로 사회의 악이라고 판단한 전당포 주인을 살해하게 된다. 본인은 분명 고리대금업자라는 인식으로 살인을 정당화시키지만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그것은 분명 용서할 수 없는 살인 행위이다. 결국 끝까지 자신의 행위를 옳다고 주장하여 종신형을 받게 된다. 또 한 예로 나치 독일의 히틀러를 보자. 대량 학살과 전쟁으로 전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지 않았는가? 비범함을 그릇되게 사용한 예를 보여준다.
사실 비범은 ‘선이다’, ‘악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는 없는 문제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비범은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범은 사용자의 의지에 의해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 노벨, 카네기 등이 비범을 선한 방향으로 쓴 사람들이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보편적인 선이다. 이렇듯 저주가 될 수도, 축복이 될 수도 있는 비범한 사람은 때론 평범함을 원하고, 평범한 사람은 비범함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평범한 가운데 비범이 들어 있다’는 진리처럼 비범한 사람들이 조금만이라도 선을 지향하면서도 온유의 미덕을 겸할 수 있다면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작게는 가정에서 형제간의 갈등이 적어지고, 직장 생활에서 마찰이 줄고, 국가간에는 대립이 원만히 해결되어 전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을 것이며, 세계는 모두 한마음으로 평범의 진리를 실현시켜 인류애를 구현하리라 생각한다.

장미라/40대/서대문구 연희동

나에겐 평범하게, 남에겐 비범하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 3절)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을 뜨끔하게 만드는 성경 구절이다.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책망한다는 뜻이다. 대다수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한 이 시대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내가 승진하는 것은 능력 때문이고, 남이 승진하는 것은 아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돈을 지혜롭게 사용하면 투자가 되고, 남이 돈을 지혜롭게 사용하면 투기가 되는 것. 오죽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다 나돌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야박하게 구는 것, 나와 남을 이중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우리에게서 흔히 연출되는 모습들이다.
그동안 자신은 옳고 남은 틀리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보통이었다면, 이제는 남이 하는 잘못은 비범하게 넘어가 주고, 내가 하는 잘못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늘 그래왔듯이 평범하게 채찍질하는 것이 어떨까.

이미영/20대/고려대 3학년

사람도 종합예술이다
난 평범하게 산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범하게 살 것이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별로 다르지 않다고 여기며 사는 것이다. 외면적으로 별로 튀는 것이 없고, 내면적으로도 희로애락에서 너나 다를 바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둘러보면 내 주위에는 비범한 사람이 많다. 비범한 인테리어 감각을 지닌 사람, 비범한 패션 감각을 지닌 사람, 가르치는 일에 비범한 열정을 지닌 사람, 비범한 글재주를 지닌 사람…. 아마도 직업이 요구하는 바, 남다른 재주를 개발해야 할 필요성 때문일 것이다.
비범함이란 타고 난 것도 있지만 갈고 닦아야 빛이 난다. 내게는 어떤 재주를 비범한 수준까지 갈고 닦을 외부적 조건이나 또 내적인 필요성도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가정 살림이라는 종합예술에서 비범함이란 죽여야 할 속성이라고 여겨졌으니까. 비범한 가정주부라는 말은 어딘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가?
난 종합예술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사람도 종합예술이다. 비범한 재주를 지닌 사람에게 다가가 그를 사귀다 보면, 어느새 비범한 그의 재주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의 비범함 뒤에는 헛점투성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평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보면, 새록새록 비범함이 반짝거린다.
어떤 게 더 좋은가? 물론, 난 평범 속에서 흘낏 보여지는 비범함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 비범함은 아무나 보지 못한다. 찾고자 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게 흠이다.

조미라/50대 /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