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이 사람 안의 비범 조은수 外


고등학교 2학년 김한규 군
그의 방 한 켠에는 여러 호스들로 연결된 몇 개의 어항이 묘한 불빛을 내며 자리잡고 있다. 한국의 고등학교 2학년생의 방과는 안 어울리게 여러 개의 촌스러운 플라스틱 바가지들이 바닥에 있다. 물고기들을 위한 장비들이다. 인터넷을 통해 희귀한 물고기들을 사기도 하고, 교환도 한다. 그리고 물고기들을 교배시키기도 하고, 임신한 것들은 따로 보관해 두기도 한다. 온도며, 불빛이며, 물고기들 사이의 미묘한 역동(?)까지 파악해야 하지만 그에게 이 모든 것들은 즐거움일 뿐이다. 물고기들을 위해 엄마 몰래 부엌에서 새우에, 멸치에 몸에 좋은 건어물들을 가져다가 직접 빻고 정성스레 먹이를 만들어 주는 그는,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는 평범한 예비 고3 수험생이다. 그리고 동시에 물고기들의 친구다.
서울 사직동의 한옥에서 할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김한규 군은 어린 시절부터 거북이고, 새이고, 징그럽게 보이는 곤충이며…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에 거부감 없이, 사랑으로 호기심으로 다가갔다. 넓지는 않지만 자연과 함께하기에는 충분한 앞마당이 어린 생물학자 한규의 연구실이자 놀이터가 되었다. 이곳에서 김한규 군은 자유롭게 싱싱하게 헤엄친다. 200여 년 전 파브르의 모습을 닮아 간다.



대학생 정진주 양
한국교원대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정진주 양은 페스탈로치를 존경하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러나 그녀와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라면 이내 그녀에게서 남다른 비범함을 느낄 수 있다.
그녀가 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한 꼬마아이를 만나면서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을 좋아하고 잘 어울려 지냈다. 동네에서 평판이 안 좋은 동네 꼬마들도 그녀에게는 착하고 순수하고 예쁜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초등학생이 한 명 있었다. 엄마가 안 계시고, 아버지 혼자 아이를 키우는데,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술 마시고 집에 와서 아이들 혼내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사정을 안 후 그녀는 더더욱 그 꼬마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공부도 봐주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고민 상담도 해주고 하는 사이에 그녀는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아이들이 지닌 재능을 발견해 주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내가 졸업해서 선생님이 되면 더 잘 돌봐 줘야죠.” 이야기하는 정진주 양에게서 벌써 의젓한 교육자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모든 인간이 다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각의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 교육이란 것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페스탈로치는 말했다. 모든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재능을 발견하는 숨바꼭질. 그 숨바꼭질을 준비하는 정진주 양은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대학생이다.



방이동 헐리우드 비디오가게 아저씨
“헐리우드 비디오인데요~” 하고 자동응답기에서 구수한 목소리가 퍼져나온다. 습관이 되어 버린 비디오 반납 연체. 때로는 까먹어서 때로는 귀찮아서 일주일씩이나 늦는 게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유통이 생명인 비디오 가게를 하면서도 도대체 돈을 벌겠다는 것인지… 연체료 한 푼 받지 않는 착한 아저씨의 웃는 얼굴이 답답하기도 하면서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집 주소, 전화번호는 단번에 기억하시면서도 어찌 내 못된 습관은 기억하지 못하는지 항상 처음인 양 미소지어 주는 아저씨다.
이제는 오히려 아저씨는 안 받겠다며 고개를 좌우로, 나는 받으셔야 한다고 고개를 상하로 흔드는 묘한 사정이 되어 버렸다. 자신의 나태에 대한 죄값을 치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아저씨의 선량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던 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고 변화된 모습이었다.
15년 가까이 같은 곳에서 같은 얼굴로 비디오를 빌려 주시는 아저씨는 가게 아저씨라기보다 옆집 아저씨이다. 아저씨가 전략적으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기’ 정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이곳의 이웃들은 아저씨의 웃음에 복종할 수밖에 없게 됐다. 150년 전 간디의 운동이 그러했던 게 아닐까? 아저씨의 웃음이 온 동네 사람들 얼굴에 널리널리 전염되었으면 좋겠다.



8살 이윤주 양
베토벤 여섯 살, 피아노 연습에 열중하다. 이윤주 여섯 살, 피아노 건반을 사랑하다. 베토벤 일곱 살, 첫번째 피아노 연주회를 열다. 이윤주 일곱 살, 가족들에게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선물하다. 베토벤 여덟 살, 위대한 궁정 음악가를 꿈꾸다. 이윤주 여덟 살, 베토벤을 꿈꾸다. 베토벤, 서른넷에 영웅 교향곡, 서른여덟에 운명 고향곡, 서른아홉에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완성하다. 이윤주, 소녀의 내일은 베토벤보다 더 크고 위대하리라.
윤주의 꿈은 베토벤처럼 위대한 음악가가 되는 것이다. 아직은 여덟 살의 꼬마 피아니스트에 불과하지만, 윤주의 가슴에 있는 음악 열정은 베토벤보다 뜨거울지도 모른다. 윤주는 레슨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매일 혼자서 부지런히 연주 연습을 한다. 어린 아이가 지칠 법도 한데, 윤주의 연습량은 주위 어른들을 다들 놀라게 한다. 그 고사리 같은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서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하는 게, 어른들의 눈에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정작 윤주는 피아노 연습이 마냥 즐겁기만 한가 보다. 늘 연습하는 곡의 음을 흥얼거리고, 학교에서도 교실 책상을 건반 삼아 연습하기도 한단다. 레슨 선생님이 오는 시간을 제일로 기다리고, 다른 또래 아이들과 달리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은 윤주의 얼굴은 마냥 행복해 보이기만 하다.
악보를 보고 한 음 한 음 건반을 신중하게 누르는 윤주의 모습은 여간 진지한 게 아니다. 아무리 해도 자기 맘에 들지 않으니 또 치고 또 치고 할 수밖에 없다는 윤주의 말에, 어릴 적 지독한 연습벌레였다는 베토벤이 어찌 안 떠오르겠는가. 얼굴이 너무나 고와서 윤주는 커서 영화배우 하라고, 어른들이 우스갯소리를 할 때에도 윤주는 “베토벤이 될 거예요”라고 했다는데, 윤주가 앞으로 써 내려갈 음악 역사는 베토벤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