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소리없는 득음 (得音)을 향하여, 광대 임진택 반칠환


춘천행 46번 도로 샛터 삼거리 종점에서 버스를 내리자 송구스럽게도 임진택 선생과 극단 길라잡이 대표 양정순 씨가 승용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개량 한복을 차려 입은 임진택 선생은 눈매가 유순하고 말투가 구수해서 마치 오래도록 만나온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저 지극히 평범한 용모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뜨거운 광대 피와 비범함을 찾으려 염탐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무림 최고수의 눈빛은 형형한 살기 너머 무심한 농부의 동공을 하고 있다고 했던가. 나는 저이가 방금 텃밭에서 옥수수를 따다 온 농부라 해도 믿을 뻔했다.

한강과 축제
우리나라 마당극 연출의 효시이자 창작극 판소리의 독보적인 세계를 일군 창작판소리꾼 임진택(52세). 나는 저이를 만나러 오면서 내내 궁금하게 여겼던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께서는 수 년 전부터 이곳 팔당댐 일대를 무대 삼아 남양주 세계야외축제를 열고, 다산유적지에서 이동 교육극을 펼쳐 왔습니다. 본래 축제란 사람이 모이는 게 관건 아닌가요? 이렇게 외진 곳에서 축제를 여는 까닭이 무언지 궁금합니다.” “이곳이 축제 장소로 매우 불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십여 년 전 여기에서 ‘환경과 생명, 자연과 인간’이라는 주제로 축제를 구상할 때 환경단체에 공동으로 개최하자고 제안했더니 실무자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이곳은 상수원 보호구역인데 축제를 하면 오염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상수원 보호구역이라고 해서 인간을 소개(疏開)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오히려 축제를 통해서 우리가 잊고 있던 이 지역의 생태적 의의를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정약용과 물
승용차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쪽에 위치한 다산 유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흔히 정약용 하면 다산초당으로 유명한 유배지 강진을 떠올리기 십상이나 실은 이곳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능내리가 생가와 묘소가 있는 명실상부한 정약용의 고향이다. 유배시절 이외에는 50여 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그이가 설명해 준다.
“이곳은 다산 유적지가 아니라 열수 유적지라 해야 마땅한 곳입니다. 열수는 한강을 뜻하는데, 스스로 짓고 그렇게 불리길 원했던 호입니다. 나는 선생이 자신과 한강을 동일시했다는 데에서 어떤 메시지를 느꼈습니다.”
임진택 선생은 극단 연습실을 남양주로 옮기면서 다산 유적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현대에 살아 계신다면 가장 관심을 기울일 당면 과제가 무얼까를 생각해 보았다. 틀림없이 자기 눈앞에 흐르는 오염된 한강물과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인 물 문제에 발벗고 나섰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올해는 유엔이 정한 물의 해입니다. 과거에는 전쟁의 원인이 이념과 종교와 영토였다면 이제는 모든 분쟁의 이면에 물의 확보라는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나는 물을 포함한 환경과 자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여기에 와 있습니다.”
요즘 새로 만든 마당극 ‘물’이 그이의 관심을 반영한다. 다산 유적지에서는 극단 길라잡이(연출 유하복/양정순)의 단원들이 펼치는 ‘다산 선생님과의 하루’라는 교육극이 열리고 있었다. 겨우 예닐곱 명 남짓한 관객들이 아쉬웠지만 구슬땀 흘리며 연기에 몰두하는 배우들의 모습에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다산이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퍼주는 장면에서는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평범과 비범
“오늘 만남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평범(平凡)과 비범(非凡)’이라죠?”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선생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잇는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한 주제입니다. 평범은 무엇이고 비범은 무언가? 저는 평범이란 과거의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고, 비범이란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새로운 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작정 새로운 것만 추구하면 엉터리 전위가 나옵니다. 새롭지만 뿌리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요즘 판소리 빠른 장단에 서양 재즈나 붙여서 자진모리 장단으로 퓨전화하는 것은 새롭다고 볼 수 없습니다. 새롭지 않은 것이 둘이나 모였으니 오히려 진부함의 극치지요. ‘비범’이란 단지 ‘평범’과 다르다는 것이 아니고 평범을 아우르는 비범이어야 합니다. 평범함의 바탕을 잃으면 그 비상함은 무의미합니다.”
선생은 ‘비범함’과 ‘기이함’의 차이를 명확히 정리해 주고 있었다.
“생명운동으로 이야기해 볼까요? 예전에 김지하 선생을 비롯 생명 사상을 이야기하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듣다 보니까 그 생명의 가치를 가장 잘 깨닫고 있는 것은 농사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 운동은 중요한 시대 정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상한 발상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사람들 속에 이미 스며 있던 비범함이었습니다. 평범을 생각하지 않는 비상함은 혼자 튀거나 빗나갈 뿐입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돌아온 곳이 중생 제도의 길이듯 모든 천재가 자신의 재능과 업적을 갖고 회향(回向)하는 곳도 궁극 평범의 바다가 아니겠는가.
“박동진 선생이 살았을 때는 명창이라고 하다가 돌아가시니까 요즘 광대라고들 부릅니다. 그런데 나는 그게 추락이 아니고 극진한 예우처럼 느껴집니다.”
아닌 게 아니라 ‘명창’ 하면 비범하게 여겨지긴 하나 ‘광대’라는 평범한 수사가 훨씬 깊고 넓은 의미와 여운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광대라는 말에는 그이의 생애와 역정이 담겨 있으나 명창이라는 말에는 그이의 영예와 결과만 담겨져 있으니 부분적인 수식어에 불과하다.

외치고 침묵하는 그림
명창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는 그이가 ‘판소리의 음악적 완성’이라 이름한 ‘득음(得音)’에 대해 듣고 싶어졌다.
“변증법의 원리 중에 양질 전환의 법칙이 있습니다. 물을 끓여서 100도가 되면 수증기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과 같이 소리꾼의 목소리도 어느 순간 질적 변화를 일으켜서 어떤 소리라도 내게 되는 것, 이걸 득음이라고 합니다. 헌데 진짜 좋은 판소리는 청각적인 게 아니고 시각적인 데 있습니다.”
소리가 보이기라도 한다는 걸까? 가히 관음(觀音)의 경지라 할 수 있겠는데 나는 눈이 둥그래져 그이의 입을 바라보았다.
“소리꾼은 내지르는 데 소리는 나지 않고, 듣는 사람도 그걸 듣지 못했는데 듣는 효과가 나는 것을 일컫습니다. 단지 연희를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단계가 아니라 눈으로 음악을 듣고 연상하고 보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임옥상 화백의 그림을 좋아하는데, 이유는 그림에 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에 오디오 장치를 하면 전위가 되지요. 그러나 그건 차원 낮은 것, 평범 자체입니다. 오디오 없이 ‘그림 자체가 외치는 것’, 또는 ‘외치고 나서 침묵하는 그림’ 임옥상의 그림이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탁월한 판소리는 그 속에 그림이 있고, 연상이 있고, 현장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광대를 보지 않고도 머리 속으로 그림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새롭지만 뿌리 있는 것
저이는 우리 나라에 문화운동의 개념을 처음 뿌리내린 1세대이며, 마당극 이론을 정립했으며 식자(識者) 소리꾼을 일컫는 ‘비가비광대’로서 창작 판소리의 작가이자 연행자이다. 판소리의 세계화에 앞장서온 저이는 지금 현대적 개념의 지역예술축제를 이끌고 있다. 새롭지만 뿌리 있는 것을 천착해온 저이야말로 스스로 내린 ‘비범함’의 정의에 속하는 인물처럼 여겨지건만 여전히 ‘농부의 눈빛’은 유순하다.
그이는 득음의 경지처럼 인생에서도 득도(得道)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인간의 자기 갱신, 자기 변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올 겨울부터는 소리 수련에 들어가서 창작 판소리라도 한 판 올려야겠다고 중얼거린다. 저 중얼거림이 내게 웅변처럼 들린다. 장차 저이가 내지르는 침묵의 소리에 귀 머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 서둘러 소리를 눈으로 보는 법을 연마해야겠다.

글쓴이 반칠환은 시인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대산문화재단에서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를 받았고, 서라벌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