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선(線) 의 상상력 박영택


이우환의(선에서.1980년, 230×180cm) 작품은 텅 빈 캔버스의 상단에서 아래쪽 방향으로 청색물감을 묻힌 붓을 수직으로 내려그은 반복적인 자취로만 이루어졌다. 붓의 형태를 닮은 선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데, 그 선들은 무엇인가를 표현하거나 상징하기보다는 오로지 선 자체만을 증거한다. 그런데 그 선은 흡사 생성과 소멸, 생과 사, 시간의 과정, 끝없는 순환구조라는 생명의 법칙 같은 것들을 침묵 속에서 보여준다. 선만으로도 놀라운 그림이 되었다.

서정국은 철로 대나무를 형상화했다.(대나무, 2001년, 252×30×400cm) 대나무는 동양수묵화의 전통적인 소재다. 대나무는 도교나 유가의 표상들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은자를 포괄하는 상징물이다. 그는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든 대나무를 마구잡이로 휘어놓기도 했다. 대나무가 표상하는 모든 이념과 명분을 해체하고 일부러 망가 뜨려놓았다. 전통적인 그림의 소재인 대나무와 난이 서정국에게는 금속성의 육체로 ‘의사재현’된다. 차가운 금속성 소재들로 이루어진 대나무는 산업사회의 대량 생산물인 철과 자연인 대나무 사이의 간극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성리학적 세계관의 함양과 군자로서의 삶의 수양적 방편으로 평생에 걸쳐 대와 난을 쳐댔다면, 그는 차가운 금속성에 식물의 부드러움과 탄력을 불어넣어 새롭게 환생시킨 그런 대를 재현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구부려 놓았다. 그것은 사물의 생명·자연을 흉내낸 의태적인 것들이다. 작가는 미술이 그렇게 자연과 조심스레 하나가 되고 닮아가면서 종래는 구분 없는 지경으로 걸어 들어가는, 스며드는 그런 경지를 은연중 보여준다. 그것은 죽은 사물의 세계를 유기체화하려는 식물적 상상력에 다름 아니다.

이상남은 직선과 곡선만으로 희한한 그림을 그려냈다.(다각형,1992년,100×65cm) 정교한 기계의 도면같기도 하고 특정한 기계의 부품을 재현한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상상에 의존해 직선과 곡선, 점과 선만으로 이루어진 어떤 그림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섬세하게 캔버스의 표면에 그려진 자취들은 인간의 손으로 그려나간 것인지 혹은 기계에 의해 재현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모호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율동과 리듬, 시간의 흐름과 정적 같은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순수한 추상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선의 기원
그림의 우리말 어원은 ‘그리다’, ‘그리워하다’이다. 그것은 또한 ‘긋다’에서 전성된 말이기도 하다. 동양문화권에서 한자의 발명과 관련되어 전해오는 이야기를 보면, ‘창힐’이란 이가 땅바닥에 찍힌 새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 그리기 시작한 것이 그 시원이란다. 땅바닥에 선을 긋는 행위 자체가 그림과 글씨의 기원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서양에서 그림의 기원으로 전해내려 오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쌍의 사랑하는 그리스 남녀가 있었다. 어느 날 사랑하는 남자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슬픔에 젖은 처녀는 자신의 집에서 기약 없는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 저녁을 함께 했다. 우연히 눈을 들어보니 벽면에 남자친구의 그림자가 촛불에 떨어진 자취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숯을 들어 그 윤곽을 선으로 둘러쳤다. 남자친구는 전쟁터로 나갔고 텅 빈 벽을 앞에 두고 처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숯으로 둘러친 선은 부재하는 남자친구의 몸을 떠올려 주면서 상기의 고통을 진정시켜 주었다. 이렇듯 선은 이미지의 근원과 연관된 무수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지향적인 선, 회의하는 선
선이란 미술에 있어서 보통 색·면과 함께 형태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특히 채색화와 구별되는 소묘화에서는 선 자체가 그림의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하긴 먹그림, 묵화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선은 본래 면 주변에 또는 면 상호간의 한계로서 이념적으로만 존재할 뿐 시각적인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계에서 선이란 없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재현적인 예술에 있어서 선은 일종의 상징적 표현이 된다. 어쩌면 그 선은 납작한 평면에 세계를 올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그 선은 직선과 곡선으로 크게 나뉜다. 직선이 남성적이라면 곡선은 여성적인 편이다. 날카롭고 공격적이며 공간을 분할하는 직선에 비해 곡선은 공간을 유영하며 틈새와 굴곡을 만들고 주름을 접는다. 직선이 시간의 흐름과 방향을 지시한다면, 그래서 목적지향적이라면, 곡선은 맴돌고 반복하며 순환의 구조를 보여 준다. 그것은 마치 말더듬이처럼 머뭇거린다. 회의하는 선이다. 그래서 이성과 진보와 발전, 과학과 한 개인의 창조적인 신화에 기반한 모더니즘이 남성적인 직선의 미술이라면, 탈모더니즘적인 미술은 여성성을 내포한 곡선적인 편이다. 몬드리앙과 말레비치 같은 이의 추상작품이 직선에 기반하였던 대표적인 경우라면, 사이 톰블리나 마숑, 오키프 등의 작품은 곡선의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직선은 점과 점을 연결하고 이어나가는 시간의 축적, 직선적인 시간관의 반영이라면, 곡선은 순환적인 시간관, 무척 동양적 시간관을 은연중 암시한다. 서양의 붓과 동양의 붓은 그 형태와 선의 궤적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관을 잘 보여주는 실제 예를 제공한다.

선의 정신, 정신의 선
선을 기본적인 조형수단으로 이용하는 모든 작품은 선이 결합되는 방식에 따라 그 의미를 갖추게 된다.
그런데 선의 기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선은 단순히 사물의 외형을 재생하는 기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이의 감정을 전해주는 한편, 그 사물, 대상의 내적인 부분, 운동과 힘과 기운 같은 것들 또한 드러낸다. 즉 방향, 속도, 힘, 장단, 굵고 가는 것, 촘촘하고 구부러짐 등의 여러 기교에 의해 무한한 정신 표출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특히 근대의 추상적인 회화에서는 이런 종류의 선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시되어야 하는 선의 기능으로는 선의 체감적인 단축에 의한 원근법의 효과나 선의 농담, 단속, 굵고 가늘기 등의 수법에 의한 색채 및 명암의 효과 등을 들 수 있다.


동양의 선, 서양의 선
미술에 있어서 ‘선적’이라고 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사물의 윤곽선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명암이나 색채에 의해 변화하지 않는 형태 자체를 파악하도록 하는 묘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사물의 실재를 촉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분명하게 한계 지워진 표현으로 명료하게 그려낸다는 것이다.
흔히 동양화는 선의 예술이라고 한다. 사군자뿐만 아니라 동양화의 대표적인 산수화도 각종 선으로 표현했으며, 선의 표현은 여백의 표현과 함께 동양화의 특징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서양의 그림은 다르다. 물체의 윤곽을 선으로 나타내지 않고 색 면과 색 면의 경계로 나타낸다. 처음에 자세히 선묘를 해도 채색을 하는 과정에서 그 선묘를 모두 덮어 지우는 것이 서양화의 일반적인 기법이다. 즉 서양에서는 물체를 면으로 보고 입체적인 처리를 중시한 반면, 동양에서는 물체를 선으로 인식하고 선의 표현을 중시했다. 동양화에서 선의 표현은 수묵화가 발달하면서 특히 강조되었다. 그림을 한자로는 회화(繪畵, ‘그림 회 혹은 수놓을 회’ ‘그림 화 혹은 그을 획’)이라고 한다. ‘회’는 채색에 가깝고 ‘화’는 선묘에 가깝다. 역사적으로 볼 때 채색화가 유행할 때는 ‘회’자를 많이 썼고, 수묵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화’자를 주로 썼다.
사군자화의 난 그림은 간단한 몇 개의 선으로만 표현된다. 그런데 그 선의 변화에 따라 여러 형태의 난초가 그려진다. 이와 같이 동양의 그림에서는 선 자체가 바로 그림이며 작가의 감정이 나타난 예술작품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힘있는 선, 부드러운 선, 개성 있는 선, 생명 있는 선 등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동양에서의 선은 힘이 있는 선을 추구했다. 필력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힘이라는 것은 겉으로 표현된 강한 힘이 아니라 화가의 내재적 기운에서 솟아 나온 기의 표현을 말한다. 이와 같이 기가 담긴 선을 강조한 것은 평범한 선이 아닌 감정이 실린 선, 생명이 있는 선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동양의 회화가 선의 예술이 된 이유는 그 도구의 특징 때문이다. 붓이 그렇다. 붓의 호(毫)가 길다랗고 끝이 뾰족하게 생겼기 때문에 선을 긋기에 알맞다. 그리고 털의 탄력이 적당하여 선을 강하게도 부드럽게도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고, 허리는 굵고 끝이 가늘어서 굵은 선, 가는 선을 마음대로 그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길다란 털 사이의 모세관 현상을 잘 이용하면 한 번의 동작으로 그은 하나의 선에서도 농담의 변화를 줄 수 있어 기(氣)가 살아있는 선이 된다. 이러한 동양의 붓이 갖는 구조상의 특징 때문에 동양 그림은 선의 예술이 될 수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는 두 개의 코드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진 미술의 세계는 그 두 개의 다른 성질을 통해 세상을 재현하고 작가의 정신과 심리를 묘출한다. 우리가 그림을 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선의 활용을 통한 작가의 음성과 언어를 접하는 일이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감각을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접하지 못한, 느끼지 못한 삶의 여러 징후들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결국 타인을 이해하는 일, 무척 어렵고 지난하지만 반드시 필요하고 피할 수 없는 일을 실질적으로 겪어나간다.

글쓴이 박영택은 미술평론가이며 경기대학교 미술학부 교수이다. 오랫동안 ‘금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