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인위와 자연, 우리의 속심미학을 찾아서 반칠환


장독대는 어디 두지?
지독한 산골 촌놈인 내가 처음 상경하여 고층 아파트를 보았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깎아지른 듯한 인공 절벽(직선)에 매달려 사는 그 아찔한 현기증이라니. 우선 먼저 드는 생각이 ‘장독대는 어디 두며 텃밭은?’ 그보다 더 어이없는 것은 천장과 방바닥의 구분이 없어 윗집이 밟으니 방바닥이요, 아랫집이 올려다보니 천장이란 점이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아파트로부터 느꼈던 직선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개 직선은 인위이며 곡선은 자연의 선이다. 산이며, 강이며 구름이 곡선이라면 책상과 책, 가방, 컴퓨터는 직선이다. 나는 무수한 직선(인위)의 편리를 수시로 누리면서도 항상 곡선(자연)의 부드러움이 그립다. 순한 거북등처럼 낮고 둥근 초가 지붕에 모개로 얹혀 있던 달덩이와 박덩이들이여.

직선과 곡선이 함께 있어야 천 년을 견딥니다
이 즈음엔 근대 진보적 역사관의 기초가 되었고, 성장과 발전이라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서구의 직선적 세계관이 두들겨 맞는 대신 동양의 순환론적 세계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때다. 나는 성북동 길상사 찻집에서 한옥 건축의 대가인 목수 신영훈 선생과 마주 앉았다. 1935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이는 중요한 국보 및 보물을 보수해 왔으며, 한옥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송광사 대웅보전, 보탑사 3층 목탑, 운문사 대웅보전 등이 주요 작품이며, ‘한옥의 조형 의식’ 등의 저서를 통해 한옥의 위상을 드높여왔다.
나는 저 직선의 아파트가 준 폭력을 떠올리며 한옥 전문가인 그이가 보는 직선과 곡선에 대해 여쭈어 보았다.
“우리 문화에는 반드시 직선 속에 곡선이 있습니다. 이 찻잔을 보십시오. 직선으로 곧게 내려오다가도 이렇게 둥글게 굴리지 않았습니까? 나무도 직선과 곡선이 함께 있어야 천 년을 견딥니다.”
단숨에 직선과 곡선에 대한 이분법적 생각을 무화시켜 버린다. 우리의 문화엔 언제나 직선과 곡선이 함께 존재하지, 직선이 곡선을, 곡선이 직선을 밀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보았다. 화엄사 구층암 사진 속에는 대패질은커녕 천연 나무의 우툴두툴한 굴곡을 그대로 살린 통나무 기둥이 우뚝 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또 토막 나무를 이어서 만든 이음기둥이 있다. 목수의 직무유기일까? 직무유기가 편코자 하는 것이라면 저건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단다. 그렇다면 직무유기가 아니라 목수의 미학이 계획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우리 것 다 버리면
어눌하거나 과묵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그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길상사 골짜기를 흐르는 물처럼 청산유수다. 우리 나라 건축 교육과 건축 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할 때의 모습은 그대로 청년인 듯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교육을 잘못하는 게 건축과에서 집만 가르쳐요.”
‘건축과에서 집만 가르치는 게 무슨 문제인가?’ 할 새도 없이 다음 말이 이어진다. “건축만 가르칠 게 아니라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뒤늦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제는 삶의 터전이 없어진 겁니다. 19세기부터 분 개화바람 이후, 박정희 때에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집을 없애기 시작했지요. 초가집만 없앤 게 아니고 그 속의 지혜까지 없앴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양옥을 갖다 넣었습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서 우리 것 다 버렸습니다. 장독대, 반닫이 다 버리고 도시로 갔지요? 그게 자기 껍니까? 그건 문화유산이에요. 자기가 자기 나라 문화유산을 내다버리고도 미안한 생각이 없어요.”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한옥은 우리 땅에 순화된 집입니다. 양옥은 순화가 안 된 집이구요. 집에는 철학과 관습과 삶이 있어야 합니다. 아파트 속에 그런 게 있어요? 집은 안식처여야 하는데 요즘 집은 사람을 내뱉습니다.”

21세기 가장 이상적인 집, 한옥
“사람을 내뱉다니요?”
“우리 한옥의 천장을 보면 대청은 높고 안방은 낮으며 부엌은 다시 높습니다. 변화가 있지요. 그런데 아파트 천장은 어떻습니까? 똑같지요? 그러니까 여자들이 자꾸 답답하고 문화병이 걸려서 집을 나갑니다. 또, 아파트엔 죽은 공간 투성이입니다. 한옥에서는 이부자리 펴면 침실, 걷고 상 놓으면 식당, 제사도 지내고 용도별로 활용이 무척 다양했는데, 양옥에선 침대 하나 놓으면 다른 걸 할 수 없습니다. 또 거실엔 응접세트가 놓여 있지요? 수용 인원 넘치면 밖으로 쫓겨나야 합니다.”
그래도 이제는 우리 한옥에 대한 관심과 반성이 점차로 생기고 있는 데 대해 저윽이 안도하는 눈치이다.
“전통의 지혜를 회복할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점차 전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21세기는 20세기와 많이 다를 겁니다. 21세기는 전자 시대입니다. 엄청난 전자파가 나오고 있습니다. 산업화된 건축자재를 사용하는 현대건축은 이것을 막는 기능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옥의 소재인 나무, 흙, 돌은 전자파를 막을 수 있습니다.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는 ‘한옥이야말로 21세기 가장 이상적인 집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수 없을 때는 형편껏 하라
“우리 고유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입니까?”
“중국이나 일본 가옥의 처마는 직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수평일 때는 좌우가 처져 보이지요. 우리는 그걸 교정하기 위해 처마 양쪽을 치켜올렸습니다. 또 논산 관촉사에 가면 머리가 아주 커서 불균형해 보이는 불상이 있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불단 앞에 서서 올려다보면 그 비례가 기가 막히게 맞습니다. 우리의 미술품은 시각적 착각마저 교정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미학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조상의 지혜는 모르고 돌아앉아서 딴소리하는 게 우리들입니다.”
“요즘엔 어떤 일을 하시는지요?”
“‘석굴암 석불사’란 책을 집필하고 있습니다. 틈틈이 집 짓는 데도 다녀오곤 하지요.” “건축주의 의견도 반영을 하십니까?”
“물론이지요. 건축주의 의견 칠십 프로, 건축가 의견이 삼십 프로 차지해요. 요즘엔 건축가가 다 하려고 하는데 그거 잘못된 겁니다. 건축가는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데, 살림집으로 작품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건축가는 집주인의 의견에 맞추어 지어야 합니다.”
한옥에 매료된 그이에게 ‘집이 뭐꼬?’라는 화두를 던져 준 사람은 송광사에 계셨던 구산 선사였다.
“나는 구산 스님이 아니었다면 ‘건축가’가 되었을 겁니다. 나는 건축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집 속의 문화, 구조보다 건축에 담긴 이야기를 찾는 사람입니다. 집이란 문화를 담는 그릇인데 문화 빼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계속해서 우리 한옥의 조형의식, 즉 왜 그렇게 집을 지었는가를 탐구할 예정입니다. 궁궐이나 종가집 같은 명품 순례보다는 초가집에 중점을 두려 합니다. 그건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우리 문화엔 반드시 직선과 곡선이 함께 있다고 했지요? 직선과 곡선을 겸한다는 것은 ‘속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에겐 생활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건 한 민족의 속심입니다. 그 속심을 캘 겁니다.”
직선(인위)과 곡선(자연)을 겸한 우리의 내심이란 어떤 것일까? 혹시 이런 메시지는 아닐까? ‘먹통은 둥글다, 그러나 그 속에 둥글게 감겨 있던 먹줄을 퉁기면 팽팽한 직선이 나타난다. 활은 둥글다. 그러나 시위는 팽팽한 직선이다. 직선과 곡선의 분리는 불필요한 이분법이다. 수의수처(隨意隨處, 그럴 수 없을 때는 형편껏 하라)야말로 유연한 속심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저이는 글 한 줄 배운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알려진 수려한 문장가이기도 하다. 저이가 펴낸 한옥 저서들에는 저이가 평생 캐어 담은 ‘우리 민족의 속심’들로 가득하다. 나는 저이가 새로이 캐어낼 우리의 ‘속심 미학’이 벌써부터 궁금하기만 하다.

글쓴이 반칠환은 시인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대산문화재단에서 시부문 창작지원 수혜를 받았고, 서라벌 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