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FBA를 찾아서 동대문 시장에 가다 남영숙



Prologue
전철을 타는 순간부터, 후회했다. ‘동대문이라면 아버지 도움이 필요하다’ ‘가게로는 못 간다. 아버지는 나를 부끄러워 한다’ 거듭되는 고민. 새벽에 동대문으로 출근하는 아버지와 새벽에 압구정에서 퇴근하는 딸, 수렴하는 점은 하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시공간의 벡터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위상(位相) 차이만큼 사고방식에 거리가 생겼다.
3D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일, 적어도 정장을 차려입고 출퇴근하는 직장을 물려주기 위해 아버지는 과분한 공부를 시켜 왔다. 성적도 곧잘 나왔기 때문에 어렸을 땐 제법 자랑거리도 됐다. 하지만 나는 반항으로 대답해 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분신 같은 동대문도 싫었다. 회색빛 하늘, 매캐한 공기, 텁텁한 고무 냄새, 본드 냄새(신발 밑창을 본드로 붙인다)…. 싫다. 그래도 해야 한다. 일이니까.

Stage 1: 패션의 메카
취재는 일종의 게임이다. 기사란 목표를 향해 플레이어인 기자는 취재원에게 적절한 질문을 하고 적절한 대답을 얻어내야 한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대사를 치고 아이템을 획득하는 롤 플레잉 게임(Role Playing Game, 대개 뭔가를 찾는 이 장르는 그래서 제목도 ‘~ 퀘스트 Quest’가 많다). 왠지 가상 세계를 걷는 것 같다.
현재 동대문운동장역. 지하철 2·4·5호선이 한데 얽힌 난맥상. 그래도 두산타워까진 헤매지 않을 것이다. 광고판만 따라가도 되는 길이다. 경기 적신호에도 상관없는 10대와 20대들 덕분에 언제나 불야성을 이루는 동대문의 마천루들.
그나저나 뭘 해보기도 전에 아침을 거른 허기가 힘겹다(게임이라면 빨간색 경고 신호가 깜박이면서 에너지 막대기가 반으로 줄었을 거다). 군밤장수 앞에 섰다. 춘삼월에 군밤? 끝물에 눈이 가는 건 일종의 ‘막차 심리’다. 마지막이다 싶으면 왠지 더 아쉬운 것이다. 슈퍼마켓 마감 시간에 하는 반짝 세일의 마케팅 포인트이기도 하다.
그런데 군밤 파는 영감님과 옆집 아주머니의 댓거리가 하염없이 길어진다. 한마디 해야 하나? “아저씨, 이게 밥이에요. 많이 주세요.” 분명 환갑은 넘으셨을 텐데 ‘아저씨’로 높여 ‘밥’이라고 과장한다. 이제 얼마나 주실까… 봉투만 쳐다보는 초조한 찰나. 애걔걔, 겨우? 괜한 립 서비스였다.
그 옆 양말 가게 현수막엔 ‘왕’ 도매라고 빨갛게 불을 질러 놨다. 고르는 척 흥정을 구경했다. 이미 두어 켤레를 손에 든 손님은 손등에 대어 보면서 스타킹이 비칠 것 같다고 하고 주인은 아니라고 한다. 결국 그것만 살 모양인데 이번엔 계산을 치르지 않았냐는 실랑이가 벌어진다. 마침내 손님은 돈을 치르고, 마지 못해 계산하는 손과 돈을 받으려고 다가서는 억울한 표정의 손이 묘하다.

Stage 2: 중고서적 거리
대형 패션몰들이 끝나는 자리에서 ‘패션 원조’라고 쓰인 재래시장 간판을 보았다. ‘원조’라는 말이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공기를 울린다.
이젠 중고 서적 거리다. 여기에선 어린이 전집, 중고 외국 잡지 등을 판다. 그런데 서점보다 도장 가게가 먼저 시선을 빼앗는다.
주인장의 솜씨가 좋다. 틀에 도장을 끼워 넣고 칼질 서너 번 했을 뿐인데 이름이 다 새겨진 모양이다. 여기에다 성곽에 해자를 두르듯 이름 주위로 한 차례 깊게 파주면 끝이다. 인주로 확인까지 하고선 “쫛쫛쫛 씨, 여기 있습니다.” 하며 내어준다. 나이 지긋한 부인이 손녀 것을 파는 듯, 한자로 해달라 하지만 아저씬 끝내 “신세대는 인감도 한글로 판다’며 한글을 고집한다. ‘신세대’ 운운하는 덴 아주머니도 두말 않는다. 아저씨의 승리다.
잡지를 내어놓은 서점가엔 앞쪽에만 사람이 몰려 있다. ‘목이 좋은’ 탓이다. 하지만 차림새가 좀 튄다 싶은 이들은 좀 더 발품을 팔아 안쪽으로 들어간다. 그들이 바로 단골이다. 뜨내기 손님들은 눈길 닿는 데서 사고 말지만, 좀 안다 싶으면 희귀본을 찾게 되고 주인과 안면을 익힐 필요가 생긴다. 일종의 반발심이다. 유명한 음식점에서 푸대접 받듯이 좀 더 손님을 대접해 줄 곳을 찾는 마음.

stage 3: 육교
청계고가를 머리에 인 육교를 건너 봄 이불이 한창인 동문쇼핑타운을 지나 종로 5가로 갈 참이다. 중국산 죽물(竹物)들과 수세미 등속을 파는 육교엔 사람 지날 틈을 빼곤 양쪽 모두 노점상들이 점령했다.
전엔 이 위로 꼭 한두 명의 걸인들이 있어서 철없는 마음에 꽤 무서워했던 생각이 난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관공서 환경 미화의 성과? 정말 환경이 미화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서울시의 청계천 복개 계획을 두고 평화시장 상인들이 일어섰다. 곳곳에 붙여놓은 대자보엔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영세 상인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요구 사항이 철회될 때까지 우리는 투쟁한다”는 저 문구. ‘관철’될 때까지란 뜻일 텐데. 생존이 걸린 문제에 차마 웃을 수도 없고, 뜻밖의 반작용을 유발하는 말.

Stage 4:동대문과 종로5가의 교집합, 도매서적과 약국 거리
여긴 길목이 꽤 재밌다. 과일·옥·화분·건강식품 등 별별 걸 다 판다. 넋을 잃고 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려 도매서점 골목으로 들어갔다.
과거 잡지가 점령했던 일등석에 ‘TV 동화 행복한 세상’ 류의 따뜻한 이야기책들이 자리했다. 각박한 세상의 반증이란 상투적인 생각을 새삼 재삼 되새긴다. 끊임없이 사람의 정을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 2003년의 한국.
원래 다니던 서점들 간판이 안보인다. 겨우 3~4년 전 일인데, 아니 그 정도면 충분히 오래된 것일까? 아무데나 들어가선 습관대로 목장갑을 낀 점원들을 잡아 출판사, 책 이름이 적힌 쪽지를 내민다. 그런데 죄다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간다. ‘여기도 전산화됐군.’
그런데 찾는 책 모두 꽝이다. 좀 싸게 사겠다고 괜한 고생을 했다. 하긴 대학 때도 그랬다. 학교에서 파김치가 된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가 허탕이라도 치면 옆에 만화 도매상으로 새서 만화책만 열댓 권씩 사다가 엉뚱한 데서 보람을 찾았다.
아까 먹은 밤도 벌써 꺼졌나 보다. 본격적인 군것질이다. 여긴 뭐든 1,000원이라 좋다. 꼬치 하날 빼들었다. “이게 무슨 고기예요?” “닭강정인데 다져놔서 맛이 잘 안 나죠?” 장사꾼이 무슨 고긴지 맛이 안난다는 얘기를 선선히도 한다. 왠지 신뢰감이 들기도 하고.
그런데 사람 끌어들이는 나의 신통력이 유감없이 여기서도 또 발휘된다. 좁은 비닐 포장에 사람이 하나 둘 들어오더니 이내 꽉 찬다. 가게에서 사람을 불러들이는 가장 확실한 호객 행위는 바로 사람이다.
참, 꼬치를 먹으면서도 아까부터 길가에서 밤 깎는 기구를 팔던 할아버지가 자꾸 맘에 걸린다. 한 개라도 팔긴 파셨는지 뽀얀 속살을 드러낸 밤이 한가득이다. 한번 팔아보지도 못하고 아침부터 저렇게 애꿎은 밤만 깎아 대신 건 아닐까? 저렇게 밤을 쌓아놓는 건 마케팅으로선 빵점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버지 얼굴은 봐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빈 손으론 그렇고 귤을 좀 살까 한다. 귤 10개에 1,000원. 싸다. 제주도에선 인건비도 안 나와서 나무째 썩힌다더니. 그래도 손님이라 싸다는 내색은 안 하고 그저 꼭지가 파란 걸로 골라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혼잣말. “다 딸기 파는데 아저씬, 귤만 파세요?” “(옆에 리어카를 가리키며) 저 집이 하니깐 난 안해요” “그러면요?” “오렌지도 팔고, 아무튼 저 집이 하는 사과, 딸기는 안 해요.”
싸게 살 마음에 모처럼 도매시장에 나서면 푸대접만 실컷 받아 기분 상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내가 가해자였던 경우도 있다.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거들었을 때의 일이다. 가격을 묻는 손님한테 한 켤레라도 더 팔 마음에 곧장 아버지한테 달려가 “손님 왔어요. 저거 얼마예요?” 하고 신나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못 들은 척 대꾸도 안한다. 도매상이 소매하면 욕 먹는다는 건 나중에야 안 일이다. 돈만 된다면 이쑤시개까지 파는 문어발 상혼 속에 거리에서 재확인한 상도(商道)다.

Stage 5: 창신동 신발가게 골목
다시 4호선 동대문역까지 와서 지하도를 건넌다. 그런데 전철 입구에 희한한 걸 팔고 있다. ‘로또 추첨기’란다. 실제 추첨 기계를 장난감 크기로 줄여놓았다. 버튼만 누르면 행운의 대박 번호까지 알아서 뽑아 준다. 그런데 바로 옆엔 투명한 돼지 저금통들이 진시황의 병마용처럼 가지런히 늘어서 있다.
어느 걸 고를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2,000원짜리 로또복권으로 잠시 부자가 된 환상! 일주일의 작은 사치! 나쁘지 않다. 사실 어느 세월에 돼지 저금통 모아 방 한 칸 마련하랴 하는 생각, 나도 한다. 같은 하늘 아래 로또 추첨기와 돼지 저금통의 대조. 나는 어떤 걸 고른 걸까? 어떤 길을 가고 있는 걸까?
퀵 서비스와 지게꾼(‘요 앞’부터 ‘좀 멀리’까지 구간별로 요금이 매겨진다. 2,000원부터 시작한다)이 공존하는 골목을 지나 시장 출입문을 밀었다. 딴청 피다가 뻥튀기 만한 양은쟁반에 800원짜리 커피를 담아 가는 다방 레지와 부딪힐 뻔했다. 다시 사람 하나 지나가기도 힘든 복도를 3,000원짜리 백반집 아주머니와 아슬아슬하게 나눴다.
이상하게 마음이 평화롭다. 결정의 순간이 지나설까? 취재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취재라는 데 아무 생각도 안나고, 아버지한테 이것저것 물을 일이 걱정이었다. 아니 아버지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시장에 들어선 순간, 난 알았다. 내가 아주 익숙한 곳에 돌아왔다는 걸. 1년에 한 번 들러도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곳. 저절로 아는 곳이었다.
동대문을 거부했지만 압구정 사람도 될 수 없었던 나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거무튀튀한 시멘트 바닥에 평평하기란 애당초 글러 먹어서 언제나 어느 구석쯤엔 물이 고여 있는 시장통, 여기가 내 뿌리다. 나의 정체성은 동대문과 동의어다.
이층이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아버지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카키색 조끼를 입고 빳빳한 종이 로프로 솜씨 좋게 신발을 싸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안다. 영원히 못 만날 것처럼 평행선같았던 우리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한테서 나왔단 걸.
아버지가 거기 있었다. 복도가 울릴 듯 크게 소리친다. “아빠, 나 왔어요. 배고파요. 밥 시켜 주세요.”

2개의 물체 A·B가 서로 힘을 미치고 있을 때, A로부터 B에 미치는 힘 FAB를 작용이라 하면, B로부터 A에 미치는 힘 FBA. 일반적으로 두 물체 사이에 근접력이 미칠 때에는 반드시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나는데, 그 작용과 반작용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다.

작용과 반작용으로 존재가 생긴다. 내가 지구를 딛고 지구가 나를 지지하므로 나는 두 발로 설 수 있다. 사람은 섬이다(영화 ‘어바웃 어 보이’에서). 섬인 것 같다.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자유롭고 싶다. 다만 그 섬도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것은 잊지말 것. 섬을 위협하는 것도 바다지만 섬을 섬일 수 있도록 감싸안는 것도 바다다. 나는 사람 많은 시장에서 사람을 다시 찾고, 아버지를 다시 찾았다.

글쓴이 남영숙은 아산장학생 동문으로, 현재 본지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