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안과 밖 ,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오동진

사진안의 안과 밖


‘패닉 룸(Panic Room), 2002’ - 안에 있는 당신, 안전하다구?
에 침입한 강도의 위협을 피해 패닉 룸으로 피신한 조디 포스터는 두꺼운 강철 문을 닫는 순간,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감 대신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싸이게 된다. 쇠문을 사이에 두고 강도와 조디 포스터는 경계선 안과 밖을 각각 나누어 차지하지만, 문제는 양쪽 모두 도무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바깥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는 데 있다. 조디 포스터는 패닉 룸의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강도들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것일까, 그래서 안으로 들어 왔지만 사실은 바깥으로 나온 셈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결국엔 더욱 더 고립돼 버리고 만 것일까. 강도들 역시 자신들 입장에서 보면 집`‘안’으로 들어오는 데는 성공한 셈이지만, 룸 안으로 들어간 조디 포스터를 생각하면 그들은 여전히 ‘바깥’에 있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데이빗 핀처의 ‘패닉 룸’은 무려 5분여에 이르는 원 씬 원 컷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안과 밖의 경계를 인상적으로 무너뜨린다. 집 바깥에서 현관의 열쇠 구멍을 통해 집안을 훔쳐보는 시점 샷으로 시작되는 카메라 워킹은 어느새부턴가 슬쩍 집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1층 홀을 이리저리 훑고는 이윽고 계단을 타고 올라와 2층 조디 포스터의 침실로 다가선다. 그렇게, 바깥 세계의 위험으로부터 분리돼 있다는, 비교적 안전한 지대라는 집의 ‘안쪽’ 그리고 그 경계는 순식간에 무너진다.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우리 모두는 세상의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일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건이 터지기 훨씬 전에 기획되고, 또 시나리오가 씌어진 것이긴 하지만 ‘패닉 룸’은 핀처다운 스릴러와 서스펜스의 감각으로 구성된, 일종의 ‘9.11 다큐멘터리’다. 부시 집권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땅, 곧 미국이야말로 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언제나 보호받을 수 있는 강철로 둘러싸인 방, 일종의 ‘패닉 룸’과도 같은 곳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빈 라덴과 그의 조직 알 카에다가 감행한 살신 공격은 그 같은 인식이 얼마나 자기 중심주의적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안에 있어도 결코 안에 있는 것 같지 않은 상황, 일순간에 발가벗겨져 바깥의 위험에 노출돼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디 아더스(The others), 2001’ - 나는 나인가?
안과 밖은 흔히들 나 그리고 다른 사람, 이른바 나와 타자(他者)의 관계로 치환돼 설명되기도 한다. 안이 바깥을 경계하듯 나는 타자를 두려워한다. 나와 다른 ‘무엇’은 설명되어지지 않는 공포다. 하지만 이 ‘나와 타자’, 혹은 ‘안과 밖’이라는 경계는 정치 권력에 의해, 혹은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조작될 수 있다는 것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영화는 바로 그 점을 폭로하는 데 있어 주효한 매체로 활용된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디 아더스’는 그 선두에 서 있는 영화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영국 남부 해안의 아름다운 저택에서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니콜 키드먼은 어느 날 세 명의 하인을 새로 고용하면서부터 집안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한다. 이상한 일이란, 집안 구석구석에서 유령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령의 공포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녀는 문득 유령이 단순한 유령이 아니며 자신들 역시 과거의 자신들과는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그녀는 누구인가. 또 유령은 누구인가. 나는 나인가 혹은 내가 생각했던 나 아닌 다른 무엇인가.
영화 후반부의 극적인 반전 탓인지 한동안 ‘식스 센스’의 아류작쯤으로 평가절하되기도 했지만, ‘디 아더스’는 ‘식스 센스’처럼 나와 타자의 정체, 그 진실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건 이 영화의 초점이 아니다. 오히려 ‘디 아더스’는 나와 타자가 각각 세상의 안과 밖을 차지하게 된 배경에 대해 눈길을 두고 있는 작품이다. 니콜 키드먼이 안 혹은 바깥을 선택한 비극적인 이유,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을 경유해 종전 직후라는 역사적 시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키 포인트다.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 - 경계의 함정
데이빗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사람들이 자신 스스로를 부정하고 나 아닌 무엇으로 변하고자 했을 때, 그래서 뫼비우스 띠와 같은 안과 밖의 모호한 경계를 의식적으로 넘나들게 됐을 때 벌어지는 가공할 공포를 다룬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로라 해닝은 배우 지망생인 나오미 왓츠를 만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나오미 왓츠가 인도한 기억의 행로 끝에는 끔찍하게 변해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인가. 데이빗 린치 감독은 이 영화에서 자신 특유의 모호한 내러티브 방식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모습조차 시공을 뛰어넘어 얼마나 자의적으로 편집되고 또 조작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나는 분명 나이지만 그건 내가 기억하고 싶어하는 부분만의 나일 뿐이다. 나와 타자 혹은 나 아닌 다른 무엇의 구분은, 따라서 무의미한 것이며, 내가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그 경계의 구분도 사실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역설적으로 매우 래디컬한 이념의 선상에 놓여 있는 작품일 수 있다. 안과 밖을 정확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태도,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화할 수 없다는 태도야말로 현재 세상을 구분하고 있는 수많은 계급적 이데올로기 혹은 계층의식, 정치사회적 편견이란 것 모두가 사실은 안과 밖 이쪽 저쪽에서 언제든지 자의적으로 선택되어지고 또 강요되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 타자로 이어지는 통로
안과 밖, 나와 타자를 주제로 다룬 영화들이 대체로 미스테리 스릴러와 호러, 서스펜스의 장르를 차용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는 그 반대로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길거리에서 인형극을 하며 살아가는 실업자 아닌 실업자 존 쿠색은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 어느 날 이상한 문을 발견하게 되고 그 문에 빠지는 순간 자기가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황당한 소재와 줄거리처럼 보이는 이 영화는 그러나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마음 속으로 늘 동경해 왔던 스타의 몸을 빌림으로써 ‘다른 사람’이 됐을 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를 보여 준다.
나와 타자간에 이어지는 통로의 발견은 곧 자신이 꿈꿔 왔던 욕망을 실현하는 길을 알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종종 이룰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꿈꾸며, 그러한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타인의 몸과 의식을 빌리는 것, 곧 타인 그 스스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타인이 된다 한들, 그래서 현실의 자신이 해낼 수 없는 것을 해낸다 한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존 쿠색은 완전히 존 말코비치가 되지만, 결국 또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욕망하며 괴로워 한다. 인생은 모순의 질곡이며 인간은 그 질곡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안과 밖, 어디에 있든 자유하시라
안에 있든 밖에 있든, 문제는 그 존재의 위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늘, 안과 밖의 공간을 의식적으로 넘나들고자 하는 인식의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진실, 또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획득해 내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영화는 바로 그 인식의 자유를 경험하게 한다. 그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글쓴이 오동진은 영화전문기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