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 나 밖의 나 ' 의 ' 나 안의 나 ' 되기 김성윤

정신과 전문의가 말하는 안과 밖


가면 쓴 사람들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다. 이 가면을 ‘페르조나(Persona)’라고 하는데, 영어의 ‘사람(Person)’이란 말의 기원이기도 하다. 페르조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또 남들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을 말하는데, ‘학생다움’, ‘남자다움’, ‘스승다움’과 같이 ‘~다움’의 모습이며, ‘본래의 나(자기, Self)’와 대비되는 표현이다. 남에게 보여지는 가면적 측면이 사람의 불가피한 속성임을 고대 서구인들은 이해하고 있었기에 ‘가면’이 ‘사람’이라는 단어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남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점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보았던 것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러길래 사람을 ‘인간(사람 人, 사이 間)’이라고 하지 않는가? 어떤 여자라도 어머니가 보기엔 딸이요, 자녀에게는 어머니이면서, 남편에게는 아내고, 이웃집 꼬마에게는 옆집 아줌마다. 남에 의해서 내가 규정될 뿐 아니라 그 남에 따라 내 태도가 달라지기까지 한다. 마치 물의 모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것과 같다. 남편 직장 부부동반 모임에서 점잔을 빼던 사장 부인도 옛 고등학교 선배를 만나면 언니, 언니 하며 어리광을 피운다.

아세요? 들리세요? 페르조나 안의 당신
남이 날 어떻게 보건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매 순간마다 주변의 기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지낸다는 것은 숨 막히는 일이다. 그래서 일부러, 혹은 실수로 겉모습을 벗어던지기도 한다. 인터넷과 채팅이라고 하는 익명의 바다를 헤집고 다니거나, 술에 만취해 난처한 말을 뱉어 버린 경험, 아니면 일상의 번잡함을 피해 어디론가 불쑥 여행을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 적이 누구나 있었으리라. 여행이란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던데, 이는 곧 가면이 필요 없는 곳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본 모습을 보게 된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술의 힘이 아니어도, 또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고도 일상 속에서 내 속의 나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흐름에 순응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야생 조랑말처럼 언제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내 속의 나를 다듬고 조련시키기란 더욱 어렵다.
내 속의 나의 모습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부끄럽거나 두려워서 일부러 외면하기도 한다. 영화 ‘마이웨이’의 주인공을 보라. 오직 마라톤만을 위해 태어난 투사인양 페르조나에 사로잡혀 가족간의 사랑을 포기한 채 한 평생을 고집스레 살다가, 결국 자신의 본 모습을 마주 대하곤 오열하기도 한다. 이런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너나 없이 가면 속의 본 모습을 잊고 지내거나, 혹은 그런 게 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지내기도 한다.

거기 당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 속의 나는 이를 외면한다고 잠자코 있지만은 않는다. 잠 못 이루는 숱한 밤으로,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슴 답답함으로, 우울증으로, 때로는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라는 삶의 회의로 나를 찾아와 자기가 아직 내 속에 건재하고 있음을 알린다. 딱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게 아닌데…’라는 느낌, 돈이 아무리 많아도, 남들이 아무리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도, 아무리 떵떵거리고 큰소리를 쳐도, 마음 한 구석엔 허전함이 남는다.
이런 느낌은 특히 한밤중 우연히 잠에서 깨어 깜깜한 방안을 응시할 때, 아니면 떠들썩한 동창회가 끝난 후 약간 취한 채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던 중에, 혹은 우연히 박스에서 찾아낸 고등학교 시절 일기장에 씌어 있는 순수하던 나날의 결심을 보면 더 잘 떠오른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만 고치고 있는 동안 내 피부와 속살은 거칠어지고 파리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페르조나를 위해 정신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동안 내 속의 나는 방치된 채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안의 나’ 햇빛 쪼이기
자, 이젠 이렇게 하자. 페르조나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 속의 내가 원하는 삶을 살자. 내 속의 나를 끄집어 내어 햇볕도 쪼이고, 단련도 시키자. 그가 원하는 게 뭔지 하루에 한 번쯤은 물어보자. 남들에게 “잘 알겠습니다”는 대답, 천천히 하자.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대답, 한 번 더 생각하고 하자. 정말 잘 알겠고,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야만 그렇다고 대답하자. 무뚝뚝하고 멋없는 사람이 되자. 지금 당장은 좀 이기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사람의 “yes”는 진짜 “yes”고, “no”는 정말 “no”인 그런 사람이어야,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어야, 진심으로 남을 위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글쓴이 김성윤은 서울아산병원 정신과 전문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