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테 마 - 미리 쓴 세 통의 편지 정연철 外


귀여운 아가에게

안녕! 귀여운 우리 예쁜 아가 다은아.
지금은 엄마 뱃속에 있지만 아빠는 급한 마음에 너의 이름을 짓고 불러 본단다. '다은아' 하고 말이야.
다은이란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라는 뜻에서 지은 거란다. 근데 너는 너의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너를 가졌을 때 아빠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기뻤단다.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아빠는 싫었단다.
1주, 2주 지나고 한 달이 되어서는 너의 존재를 아빠에게 알려 오더라. 다름 아닌 엄마의 입덧이지. 아빠는
우리 다은이도 사랑하지만 엄마도 엄청나게 사랑한단다. 엄마의 입덧을 보면서 이 아빠는 괴로움과 기쁨이
교차했지. 그러나 괴로움이 더 컸던지 엄마에게 입덧을 덜하는 한약을 먹게 했단다. 그 순간 아빠는 너에게
너무나 미안했단다. 아마 너희 엄마는 아빠의 마음을 모를거다. 그러고 난 다음 엄마의 입덧은 멈추고
다행히도 아빠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한달 한달 지나면서 너의 성장과정을 필름이라는 작은 종이쪽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동그란 것이 어느덧
길고 뼈마디가 생기고,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단다. 아빠가 생각하기론 엄마가 약해서
네가 필요한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으며 자랄 수 있을까 하고 걱정을 많이 했단다. 그러나 의외로 너는 잘
자라고 있었지. 9월 18일 엄마가 병원에 가서 너하고 만나고 왔더라. 무척 건강하고 자리를 잘 잡았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나봐.

다은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어. 아빠는 네가 무척 보고 싶단다. 우리 다은이는 아빠, 엄마 보고 싶지 않니?
지금까지 다은이가 잘 커왔듯이 세상의 문을 나올 때까지도 조심하고 튼튼하게 자라 주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요즘 걱정이 많단다. 너를 나을 때의 아픔이라는 것이 있는데 엄마는 그 일에는 초보란다. 초보란
두렵고 힘들고 하지. 너보다 먼저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있는데, 그 아이들 중에는 엄마를 무척이나 힘들게
하고 나온 아이들이 많단다. 우리 다은이는 착하니깐 엄마 힘들게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너도 힘든데 이렇게
얘기하는 아빠의 마음은 더욱 무겁단다. 왜냐면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니깐.

며칠 전에 엄마 아빠는 너를 맞이하기 위하여 너의 새 옷과 너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단다. 오랫동안
걸어서 힘들었지만 너를 만난다는 생각에 참을 만했어. 다은아, 네가 아빠의 자식이 된 걸 환영해. 고맙구,
그리고 행복하구. 엄마는 아빠가 생각하는 그 이상일거야. 네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단다.
나중에 세상에 나오더라도 너무 놀라지는 말아. 특히 할머니는 많이 궁금해 하신단다.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신데, 조금이라도 건강한 모습으로 다은이를 맞이하려고 요즘 열심히 운동하신단다. 이제 다은이가
태어나면 우리 식구는 4명이 되는 거야. 할머니, 엄마, 아빠, 그리구 다은이. 우리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아빠는 다음을 위해서 말을 아끼련다. 지금 얘기 다 하면 너도 머리 아플거구.
나중에 아빠가 너에게 해줄 얘기도 없어질 것 같아. 다은이와의 오늘 대화, 아빠는 무척 즐거웠고 태어나서
아빠와 대화를 자주 하자. 그럼 우리 만날 날을 기대하며 이만 줄여야겠다. 잘 있어.

글쓴이 정연철은 아산재단 구매부 대리로 근무하고 있다.


21살, 나의 유서

안녕.! 먼저 이렇게 인사를 해야겠어요. 나와 사람들과 세상에게.
요즘에 나는 감격에 겨워합니다. 감탄할 것들에 감탄을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재밌을 수가,
어떤 사람을 보면서 어쩜 저렇게 살아갈 수가,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쩜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언젠가는, 나는 참 감수성이 풍부하기도 하지, 얼마나 잘 살고 있느냐 했지만, 어제는 그만 기분이 나빠져
버렸습니다.
나는, 박수만 치고 있으니까요. 내가 한심스러워질까봐 걱정이 됐습니다.
나는 성공을 향하여 항상 나를 몰아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겐 주인공인 내가 한없이 아쉬울 뿐이에요.
(그것 봐요. 이만큼 생각하는 데도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나는 너무 잘 살았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고, 행복했던 기억이 너무나 많으며, 감사하고,
감사한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나는 정말 가난했습니다.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일들도 있지만, 추억이라고 할 수 없는 아프고 슬픈 일들도
많아요. 조금씩 이런 내가 상대적으로 부유하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만, 그래서 감사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좋아요. 내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상처받은 치유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정말 가슴이 벅차 올랐기 때문이며, 바나나를 아끼지 않고 먹을 수 있게 됐을 때에도, 누군가에게 편안하게
무언가를 사줄 수 있게 됐을 때에도, 학자금 융자를 신청하고 엄마와 헤어지며 뒤돌아섰을 때에도,
나는 기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정말 모난 사람이었습니다(물론 지금도 그렇긴 합니다). 부끄러운 기억이 많습니다. 가끔 기억이
나면, 신음소리를 낼 만큼 후회스러운 일도 많아요. 그런 내가 조금씩 변화합니다. 화가 나던 일에, 짜증이
나던 일에 그렇지 않을 때, 여백과 고독과 느림을 즐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정말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했습니다.
이렇게 나는, 내 인생이 드라마 같다고, 여기저기 복선도 있고 착착 맞춰지는 것 같으며, 재미있고 신기하고
감동적인, 하지만 처절하게 힘겹고 캄캄한 드라마 같다고(물론, 주인공인 내게) 말합니다.

항상 세상은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보고 느꼈던 것이 많아질수록, 나의
반응은 무뎌지면서 답답하고 짜증스러워지는 건 왜일까요?
'나무 심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었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주지 않지만, 내가 볼
것은 그것이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며, 내가 할 것은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잠잠히, 묵묵히 해나가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영원하게 생각하고, 지금 이 순간에 100% 거하며 살아가려고 했는데, 살아갈 때는
까먹었다가, 이제 죽는다고 하니 더 또렷이 생각이 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미리 써보는 것이니 다행이지요?)

글쓴이 정유진은 고려대학교 학생이다.


내가 헤쳐 나온 너에게

T.S.(내가 방금 떠나온 빈 껍데기 육신의 이니셜)
나는 지금 잠 깨어나 둘둘 말고 자던 이불을 젖힌다. 아니 내가 헤쳐 나온 것은 너다. 너를 벗어난 허공은
시원하고 부드럽다. 유영하기 그만이다. 순식간에 도달한 천장 부근에서 멋진 돌핀 킥을 하며 힐끗 널 본다.
아니 웬 씁쓸한 미소?
수십 년 몸 씻기운 강호(江湖)에 미련이라도, 애달픈 가족, 남은 약간의 재물, 애지중지하던 몇천 장서가 입맛
쓴가?
이야기해 주겠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고 한다. 한 남자가 네 명의 아내와 산다.
첫째와는 늘 침식을 함께 할 정도로, 둘째와는 깨어있는 동안 잠시도 곁을 떠나지 못할 만큼 사랑했다. 셋째는
가끔씩 찾아가는 정도였고, 넷째는 남편을 위해 열심히 시중들고자 했으나 남편은 조금도 사랑해 주지 않았다.
하루는 남편이 먼 길을 떠나게 되어 첫째 부인에게 동행을 요청했으나 단호히 거절당한다. 둘째는 '첫째도
동행하지 않는 마당에 왜 나냐?'고 거절한다. 셋째는 한평생 몸맡긴 처지이니 마을 어귀까지 따라가겠다고
한다. 남편은 결국 염치없게도 마지막 부인에게 부탁하기에 이른다.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
드리겠습니다.'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린 남편의 삶은 유복했달 수 있다. 먼길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야 참다운 사랑을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랬기에 헛 인생이 아닐 수 있었다.
T.S. 너는 벌써 속뜻을 어렴풋 알겠다는 표정이군. 그래, 먼길을 떠남은 바로 죽음이지. 첫째 부인은 몸이고,
둘째는 재산, 명예를 말함이다. 셋째는 일가나 친척 친지들을 의미한다. 장례식에 참석하고 일부는 묘지까지도
배웅한다. 넷째 부인은 바로 업(業)이다. 업이란 우리가 매순간 짓게 되는 선행과 악업을 말하며, 이것만이
마지막 길까지 동행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T.S. 약간 의외의 표정이군. 약간 예상이 빗나갔는가? 그대가 마지막 가는 길에 정말 누구랑 동행할지 새롭게
알게 되어 반갑네. 왜냐 하면 그대와의 대화는 약간 유보된 미래의 미리 맛보기 테마이며 그대 삶을 고쳐 살 ?br>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지.
잊지 말게. 다음과 같은 명언이 있다네.
"이 세상에 죽는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T.S. 이제 다시 답답한 그대 몸속으로 돌아드네.(그 순간 T.S.는 끙, 하고 돌아눕고는 쩍, 입맛을 다신다. 아이고, 죽을 뻔했다.)

글쓴이 황태식은 서울아산병원 이영선 간호4팀장 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