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테 마 - 서문으로 길찾기 성희용


서문에는 책의 취지나 본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와 있으며, 집필 원칙이나 집필 방향도 드러난다.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태도가 묻어 있기도 하고, 책이 나오기까지 겪었던 에피소드도 가끔 들어가 있다.
한마디로 서문은 본문보다 먼저 읽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마음을 움직이는 서문을 좋아한다. 나에게는 서문이 책을 향한 열정을 북돋워 주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온 힘을 기울인 글쓰기의 모습, 독자를 최대한 염두에 두고 있다는 느낌,
저작물이 저자의 땀방울이 깃든 노작이었음을 느끼게 해주는 서문은 책의 글자 한 알 한 알이 소중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또한 그들의 열정이 전해져, 나에게 독서열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서문은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사전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와 책을 읽기 위한 감정의 결을 고른다는 의미에서 운동으로 치면
워밍업이다. 준비 운동없이 물에 들어가면, 자칫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서문 읽기는
중요하다.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의 서문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구효서 지음/1993년 6월/세계사

<나는 내가 하고픈 일을 할 뿐이다. 지극히 궁핍하게 살면서도 어찌된 일인지 잘못 살고 있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많지는 않지만 내 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겠지, 한 번 읽어 보라고 옆사람에게
권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잡지에 싣고자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걸 책으로 묶겠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사람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다 신이다.>

이 소설집의 서문에서 작가 구효서는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고 고백한다.
연구 보고서나 사고 보고서, 방송 구성 대본 등의 틀거리를 하고 있는 다양하고 낯선 형식의 소설들이 눈앞에
펼쳐져 독자들은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기존의 형식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가장 잘 담아 낼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면 그에 맞는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 내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작가는 이것이 소설일까 아닐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독자보다 먼저 질문을 던져 독자의 궁금증을 애당초 막아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서문에 쓴 고민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고민일, 그러한 심정을 구효서는 작가의 말에서 솔직하게 전하고 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서문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2000년 6월/웅진닷컴

<모쪼록 독자가 나름대로 지니고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로써 미궁 진입과 미궁 탈출을 시도해 보기
바란다. 미궁의 입구에서 기다리는 아름다운 공주 아리아드네는 이렇게 진입과 탈출을 시도한 독자, 이렇게
진입과 탈출에 성공한 독자에게만 존재한다. 테세우스의 아리아드네가 아닌 '나'의 아리아드네를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신화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이 책에서 이윤기는 서문 역시 신화의 한 토막으로 풀어간다. 크레타 왕 미노스가
지시하여 만든 미궁과 그 미궁에 살면서 인간을 잡아 먹는 미노타우로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미궁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는 테세우스의 얘기가 그것이다. 미궁 안의 길을 미로라 부르는데, 테세우스는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 속에 들어가서 빠져나온다. 미노스의 딸 아리아드네가 들어간 길을 표시할
수 있는 실타래를 테세우스에게 쥐어 주었기 때문에 나오는 게 가능했다. 이윤기는 신화 역시 미궁과 같아서
자진해서 들어간 독자들이 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실타래란 다름 아닌 상상력이다.

'서양미술사'의 서문
서양미술사 E.H.곰브리치 지음/백승길 번역/1994년 3월/예경

<이 책은 미술이라는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나라에 첫발을 내딛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E.H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두 권으로 된 미술 입문서이다. 저자 곰브리치는 서문에서 집필 원칙과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겪은 약간의 난관, 그리고 책을 어떤 규칙으로 구성했는지를 상세하고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곰브리치가 적었듯, 미술에 관심을 갖는 초보자들을 위한 책이며, 작품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데
여러 모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서문에서 그는 기존의 미술 서적이 가진 악덕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책을 집필할 때 전문 용어의 의도적인 사용을 피하여 되도록 쉽게 읽을 수 있게 썼음을 강조한다.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서문에 있어야 될 요소들을 고루 갖춘 이 책의 서문이 유달리 돋보이는 이유는
저자가 서문에 예술가의 가장 근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쓰는 자세,
미술 작품을 대하는 자세, 예술가로서의 자세 등, 서문 자체로도 하나의 훌륭한 저작이 된다.

'수련'의 서문
수련 채호기 지음/2002년 6월/문학과지성사

<시는 늘 불가능을 향해 뜨거운 구애의 눈길을 던지는데, 또한 그 불가능은 '가능하지 않음'이 아니라
'가도가도 가능함에 다다르지 못함'이다. 아시다시피, 그 채워지지 않는 도정이 바로 아름다움이 솟아나오는
지점이다. 감히 그리고 수줍게 말씀드린다면, 내 시가 늘 그 도정에 있기를 나는 바랐다. 아아, 언제까지
열정이 허물을 덮을 수 있을 것인가.>

'수련'은 채호기 시집이다. 목차 앞의 '自序'에는 시집을 묶어 내는 시인의 심정을 몇 자 적곤 하는데,
'수련'의 '시인의 말'에는 시를 향한 시인의 태도가 간명하게 드러나 있다.

'행복한 책읽기'의 서문
행복한 책읽기 김현 지음/1992년 11월/문학과지성사

<선생은 유고의 뒤처리를 부탁하는 자리에서, 삭제하는 게 나을 부분 -특히 사람 이름들과 관련하여 -이
있다면 판단해서 지워달라는 부탁을 남겼었지만, 나는 어디서도 그래야 할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선생
자신이 이미 세심하게 모든 것을 배려해 정리해 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차라리 나는 선생이 더 많은 부분들을
노출시켜 놓았었으면 하는 아쉬움마저 느낀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가 빈틈으로 스며들고 빈틈을 메우며 '김현'을 읽어내는 수밖에….>

'행복한 책읽기'는 작고한 평론가 김현이 적은 1986년에서 1989년까지의 일기이다. 책이 출간되던 시점에서
저자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에 이 책의 서문은 저자가 직접 쓰지 못했다. 대신에 그 원고를 건네받은
소설가 이인성이 서문을 썼다. '해제'라는 이름 아래 쓰여진 서문에는, 저자 김현에게 일기 쓰기가 갖는 의미와
대화에 기초한 김현의 글쓰기 방법에 대한 이야기, 책 제목이 나오게 된 경위와 책이 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적고 있다. 오랫동안 저자와 가깝게 지냈던 이인성의 '해제'는 책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책이라는 저작물 이전에 '저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든다. 저자를 향한 애정의 글쓰기는 독자로 하여금 역시
애정을 가지고 글을 읽게 만든다.

글쓴이 성희용은 월간 '베스트셀러'의 편집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