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 포커스
아산재단, 창립 39주년 기념 심포지엄 개최 | 등록일: 2016.06.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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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재단, 창립 39주년 기념 심포지엄 개최
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 정몽준)은 23일(목) 오후 2시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 오키드룸에서 학계와 관련 전문가 150여명을 초청 ‘다문화 시대와 한국의 사회통합’을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한국어와 문화교육, 통일교육, 법제도와 시민교육 등 다양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다문화 교육 현주소를 진단하고, 우리가 다문화 사회에서 지향해야 할 교육방법을 제시하고 논의했습니다.
특히 이번 심포지엄은 문대양 미국 하와이주 전 대법원장의 축사로 의미를 더했습니다. 대법원장은 1900년대 초 사탕수수 노동자로 하와이에 정착한 초기 이주한인의 손자입니다. 1993년 한인 최초 하와이주 대법원장에 오른 문 전 대법원장은 본인이 이민자로서 경험한 미국 다문화 사회의 소회를 밝혔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을 하는 윤여탁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점차 구성원이 다양해지고 있는 다문화 사회 속에서 기존의 교육은 주로 다문화가정 자녀의 정착이나 학습문제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사회통합을 위해서는 모든 시민들을 대상으로 다문화 교육이 이뤄져야 하며, 학습자에 따라 각각 다른 목표와 내용,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우리가 이뤄야 하는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은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억압하는 ‘용광로’가 아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며 상호 조화를 이루는 ‘샐러드볼’ 사회이며, 이를 위해 언어와 문화교육, 통일교육, 시민교육 등 다양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다문화 시대 한국어 의사소통과 문화교육’이라는 주제로 발표하는 민병곤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이주민들이 한국에 거주하면서 겪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어려움은 단연 언어문제이다. 이주민 근로자와 결혼 이주민은 듣기, 말하기의 수요가 높은 반면, 이주민 자녀의 경우 읽기, 쓰기의 수요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고 분석했습니다.
“중고등학생 96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0% 이상이 외국이주민과 관련된 문화교육을 연 1회, 혹은 분기당 1회만 경험하고 있다. 일회성이고 단편적인 언어문화 교육이 아니라 구성원 간 상호작용을 다루는 지속적인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상호 교육의 필요성을 덧붙였습니다.
박성춘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다문화 시대의 통일교육’ 주제 발표에서 “현재의 통일교육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민족공동체 개념을 중심으로 남북관계 이해를 높이려는 목적이다. 이제는 국제사회 어디서나 받아들일 수 있는 통일교육 목표설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다양성이 증가하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공동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다문화시대의 통일 교육은 젊은 세대들의 통일의식을 고취시키고 통일 과정 및 이후 사회통합을 준비하는 미래지향적 통일교육이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진석 부산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는 ‘다문화 시대 사회 통합을 위한 법제도와 시민 교육’을 발표하며 “현재 우리나라는 다문화 관련 법제 총괄 체계가 미흡하고 종합적 관점에서의 접근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법제의 방향 설정과 법제 간 연계가 미흡할 수밖에 없다. 한정된 지원대상과 부정적인 인식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현상을 분석했습니다.
덧붙여 “다문화 관련 법제를 총괄하는 ‘다문화 통합법(가칭)’을 제정하고 다문화 사회에서의 국가적 방향성 설정 및 다문화 관련 부처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을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1977년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취지로 설립된 아산재단은 지난 1979년부터 한국 사회의 발전과 국민복지 증진을 위해 매년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해 오고 있습니다.
────────────────────────────────────────────────── ■ 인사말 <정몽준 이사장>
올해는 더위가 유난히 일찍 찾아온 것 같습니다.
축사를 해주실 로널드 문 미국 하와이주 전 대법원장님,
축사자인 로널드 문 대법원장님을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문 대법원장님은 하와이 이민 3세로 ‘문대양’이라는 우리 이름을 갖고 계십니다.
110년전 하와이로 이민을 가신 문 대법원장님의 선대는 물론 본인도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체험하셨습니다.
법관의 길을 택하신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또, 사모님은 일본계, 두 며느님은 각각 일본과 백인계인 다문화가정을 꾸리고 계시십니다.
‘다문화 시대와 한국의 사회통합’라는 오늘 심포지엄 주제에 대해 누구보다 깊은 이해를 갖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멀리 하와이에서 참석해주신 문 대법원장님을 박수로 환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다문화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다문화국가 건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의 심포지움은 우리가 생각해 봐야할 점들을 짚어보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복지라는 말 자체가 생소하던 1977년에 가난과 질병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고 하시면서
아버님은 “어려운 이들이 상대적 박탈감과 위화감, 그리고 차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이 말씀은 그 당시 사회상에 대한 소회이셨지만, 다문화시대에 우리가 당면한 도전을
피부색깔이 다르고 한국말이 서툴고 종교와 문화가 다르다고 차별받는 분들이
바쁘신 중에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합니다. ──────────────────────────────────────────────────
■ 축사 <문대양 하와이주 전 대법원장>
알로하 안녕하십니까?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님,
창립 39주년을 기념하는 아산재단 심포지엄에 축사를 하게 되어 매우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성공적으로 수년간 소외계층을 위해 끊임없이 지원할 뿐만 아니라, 공공의료 서비스, 의료 복지 프로그램, 장학금 지급, 학문 연구와 같은 프로그램을 활발히 진행해온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아산재단 모든 일원께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미국 태생의 제 3세대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잠시 시간을 빌어 저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의 한 일간지에는 “한국인들이 도착했다.”라는 제목으로 “은둔의 왕국에서 102명의 사람들이 농장 노동으로 기회를 찾기 위해 이곳 하와이로 모여들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56명의 남성, 21명의 여성, 25명의 어린이를 실은 미국 상선 S.S 갤릭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기사에서는 이러한 한국인들의 이주가 “처참한 불행과 고통을 야기한 한국의 기근 때문일 것이며 그로 인해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수백구의 시신이 매장되지 못한 채 수일 동안 그대로 남아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이주민들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고국 땅을 떠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곧 닥칠 일본의 침략 때문이었습니다.
제 1세대 이주민 중에는 제 친조부이신 평양 출신의 문충헌 씨와 외조부이신 서울 출신의 이만기 씨도 계셨습니다.
조부들께서는 보다 순탄한 삶과 많은 기회를 얻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희망과는 달리,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고된 농장 노동과 편견, 차별에 맞서야 했고, 영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조부들께서는 주류 사회에 동화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조부들께서는 투철한 근면 정신으로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애쓰셨고,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직접 만드셨습니다. 그 결실로, 하루에 69센트를 버는 농장 노동에서 시작하여 조부께서는 양복점을, 외조부께서는 이발소를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제 아버지 문덕만 씨는 양복점을 물려받아 의류점으로 재단장하셨고, 제 어머니와 함께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하셔서 자식 4명을 대학과 대학원까지 진학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1970년에 아버지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55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한인사회를 돕던 아버지의 공을 기려 박정희 대통령이 이끌던 한국 정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후인 1971년에 제 어머니를 한국으로 초청했습니다. 제가 성장하던 내내 아버지는 “공공 서비스는 우리가 이 땅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대해 지불하는 대가다.”라는 말씀을 늘 하셨습니다.
1971년 저는 어머니와 함께 제 조상의 땅을 처음으로 밟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폐허는 남아있었지만, 재건이 진전되고 있었고, 한국인들의 독창성은 여전한 듯 보였습니다. 당시 저는 평양을 떠나 합판과 판자로 임시 건물을 만들어 양복점을 운영하면서 그곳에서 아내와 세 자식과 함께 생활을 했던 제 친조부의 동생분을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45년이 지난 지금, 정몽준 이사장의 초대로 아산재단 창립 39주년 심포지엄에서 축하의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서야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1971년 제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아산재단의 정주영 설립자께서 향후 그의 유산의 된 국내외 프로젝트들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건설을 통해 활발히 진행하고 계셨다는 점입니다. 정주영 설립자야말로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국이 눈부신 성장을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정주영 설립자는 뛰어난 비전을 갖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정주영 설립자는 소외된 계층에게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보다 나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성과들을 이러한 취지에서 다양하며,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제는 정몽준 이사장의 지휘 아래에서, “빈곤과 질병 없는 세상 만들기”라는 정주영 설립자의 재단 설립 원칙은 여전히 길잡이가 되고 있으며, 정몽준 이사장은 설립자의 비전을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례로, 서울아산병원은 10년 연속 “존경받는 병원” 1위로 선정되었습니다. 아산병원은 건강관리에서 의료 연구, 교육에서 장애인과 노인을 위한 종합 복지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활동을 넓혀왔습니다. 아산병원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국가에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네팔에서 최악의 지진이 발생하자, 아산병원은 지진 피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즉각 의료진을 파견하고 각종 자원을 지원했습니다.
학문 연구 분야에서 정몽준 이사장은 아산정책연구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아산정책연구원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및 남북통일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들을 연구하는 독립적인 싱크탱크 기관입니다.
또한 정몽준 이사장은 정주영 설립자의 10주기에 그의 기업가 정신을 기리고, 사회 불평등 완화와 젊은이들의 기업가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정주영 설립자가 남긴 유산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정몽준 이사장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단체들과 사업들은 정말 놀랍습니다.
고무적인 성과를 거둔 데 대해 정몽준 이사장과 아산재단 측에 축하의 말씀을 전하며, 앞으로도 더 많은 결실이 맺어지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심포지엄의 주제가 다문화주의라는 점에 관심을 표하며 제 축사를 마무리 지으려 합니다. 다문화주의야말로 현재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장 시기적절한 주제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주인 하와이 출신인 제게는 다문화주의가 무척이나 익숙합니다. 저는 95% 이상이 백인인 아이오와주의 여러 학교에도 다녔습니다.
1971년에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어머니는 이 조선 호텔에 계셨고 저는 지금은 없어진 반도 호텔에 있었습니다. 통역사와 저는 식당을 찾으러 다니는 중이었는데, 한 신문팔이 소년이 제가 다가와 한국말로 말을 건넸습니다. 그래서 전 제가 아는 유일한 한국말인 “한국말 몰라요.”라는 말로 답을 했습니다.
소년은 화가 난 듯이 한국말로 뭐라 투덜대더니 이내 뛰어갔습니다. 제가 통역사를 쳐다보자 그는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당신은 바보같은 일본인 관광객입니다.”
정몽준 이사장님, 이 자리를 빌어 저희 부친의 말씀을 전합니다. “공공 서비스는 우리가 이 땅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대해 지불하는 대가다.” 정몽준 이사장님이야말로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분이고, 세상의 영웅 중 하나입니다.
정몽준 이사장님과 그 외 여러분 감사합니다. 마할로! ────────────────────────────────────────────────── "Aloha, and An-nyung-ha-shim- mee-ka?" Dr. Chung Mong- Joon, Chairman of Asan Foundation, It is my great pleasure and honor to give the congratulatory remarks at the Asan Foundation Symposium commemorating the 39th Anniversary. I extend my sincere congratulations to Chairman Dr. Chung Mong-Joon and the entire Asan Foundation team for not only successfully and continuously serving the poor and underprivileged throughout the years; but for the substantial expansion of the programs from medical services to social and medical welfare, scholarships and academic research. As many of you know I am American by birth, 3rd generation Korean-American. Allow me to digress briefly, regarding my background. On January 13, 1903 the headline of Hawaii’s daily read: “Koreans arriving”, with the byline: “One hundred and two subjects of the Hermit Kingdom Reach here to try their luck at plantation labor.” The story reported that the S.S. Gaelic had arrived in Honolulu, carrying 56 men, 21 women and 25 children. The article speculated that the immigration from Korea was “Probably due to the effects of the recent terrible famines that caused such misery and suffering in Korea. The population of an entire district died from the effects of famine and for days hundreds of corpses remained unburied”. However, explanation by some of the other immigrants indicated another major catalyst for leaving Korea was the apparent impending invasion of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by Japan. Amongst the first immigrants were my Grandfathers, Moon Chung Hurn, from Pyong Yang, North Korea and Lee Man Kee, Seoul. My grandfathers expected to find a much easier life and bountiful opportunities. Instead, they were confronted with back breaking work on the plantation, prejudice and discrimination, aggravated by their inability to speak English...and thus, great difficulty assimilating into the mainstream. However, their work ethic was astounding as they strived to obtain the resources to educate their children, creating opportunities for a better life than they had. From the plantations earning 69 cents a day, to acquiring their own businesses, Haraboji Moon, a tailor shop; Haraboji Lee, a barber shop. My father, Moon Duk Mann inherited the tailor shop, converting it into a retail clothing store wherein, both my parents worked long hours and were able to send their four children to college and graduate schools. My father died in 1970 at the relatively young age of 55. As a result of his work assisting Koreans in the community, the Korean government led by President Park Chung Hee recognized my father posthumously, by inviting my mother to Korea in 1971. My ah- boji’s favorite saying throughout my growing years was”Public service is the rent one pays for the space he or she occupies here on earth”. In 1971 I accompanied my mother to Korea, my first trip to my ancestors’ country. Although the devastation of war was still evident, progress to rebuild had been made and Korean ingenuity appeared intact. I recall visiting one of Haraboji Moon’s younger brothers who had escaped from the North and was doing business as a tailor in a makeshift shop he made of plywood and cardboard, which also served as home, for him, his wife and 3 children. 45 years later it truly is my good fortune that I am introduced to Chairman Dr. Chung Mong -Joon and being invited to deliver these congratulatory remarks at Asan Foundation 39th Anniversary Symposium. What I’ve found to be amazing which I only recently realized, is that during my 1st visit to Korea in 1971, the Founder of Asan Foundation , Chung Ju-Yung was already hard at work in establishing what became his legacy in taking the lead in domestic and foreign projects with the Hyundai Motor, Heavy Industries, and Engineering and Construction. Founder Chung became widely known as an indispensable factor in Korea’s rise from the ashes of the Korean War. The late Founder Chung Ju-Yung was a truly a visionary. He envisioned giving the disadvantaged opportunities for a better, fuller and happier life by providing them access to medical services and education. His accomplishments towards this end has been numerous and substantial. Under Chairman Chung Mong-Joon, the Founding Principle of his father …“To Build a World Without Poverty and Disease”...continues to be his template and …unquestionably he has made tremendous inroads in pursuing his father’s vision. As examples, Asan Medical Center has won the “Most Respected Hospital” award for 10 years in a row. It has expanded its activities from health care to medical research, from education to more comprehensive welfare for the disabled and elderly. Its service not only reaches every corner of Korea, but other countries as well. Last year following the devastating earthquake that hit Nepal, Asan immediately sent medical staff and much resources to the suffering. In the area of academic research, Dr. Chung founded the Asan Institute for Policy Studies. The institute is a highly respected independent, non-partisan think tank under the mandate to research policies to foster environments conducive to peace and stability on the Korean Peninsula and Korean Unification. Also, in tribute to commemorate the 10th anniversary of the passing of his father and his entrepreneurial spirit, Dr. Chung established the Asan Nanum Foundation to contribute to the alleviation of social inequality and to promote entrepreneurship among the youth. The list of services and organizations emanating as a result of Chairman Chung’s motivation to perpetuate his father’s legacy is truly incredible. I congratulate Chairman Dr. Chung Mong-Joon and Asan Foundation for its inspiring accomplishments and I am confident more are forthcoming. I close by briefly mentioning that my interest peaked upon learning that today’s Symposium is on Multiculturalism, a most timely subject effecting countries throughout the world. Multiculturalism is familiar to me as I’m from Hawaii, the most Multicultural State in the U.S. . I also attended schools in the State of Iowa, where the population mix was 95 plus % White. Also, in 1971 while on my First trip here in Seoul, my Omoni was at this Chosun Hotel and I was at The Bando Hotel, no longer here. My interpreter and I were on our way to find a restaurant. When a young Korean boy selling newspaper came up to me and spoke in Korean, I respond in the only words I knew in Korean, “ Hangook-mal mollayo!” The young boy angrily rattles off in Korean and then runs down the street. I look at my interpreter, who explains, He said you are a dumb Japanese tourist! Dr. Chung, I take this opportunity to note that my Father's saying speaks directly of you, “Public Service is the rent one pays for the space he occupies here on earth!” You sir, have and are definitely paying excessive rent, and I submit that you are clearly one of the world's heroes of humanity! Chairman Dr. Chung and All, Kam-sa-ham-mee-da! Mahal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