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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개최 등록일: 2015.11.23

아산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 개최

 

‘아산, 그 새로운 울림: 미래를 위한 성찰’ 주제

11월 23일(월) 오후 2시, 서울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서 열려

    

 

아산사회복지재단(이사장 정몽준)은 아산의 정신과 가치관을 재조명하는 ‘아산 정주영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을 11월 23일(월) 오후 2시 서울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개최했습니다.


이번 학술 심포지엄은 ‘아산, 그 새로운 울림: 미래를 위한 성찰’이라는 주제로 <아산 연구총서> 집필자들과 진행자가 아산의 철학과 이념, 경제와 경영, 국가와 정치, 복지와 교육 등에 대해 대담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아산 연구총서>는 아산의 정신을 계승하고 확산하기 위해 아산재단과 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이 공동으로 기획, 대학교수 20명이 ‘얼과 꿈’, ‘살림과 일’, ‘나라와 훗날’, ‘사람과 삶’ 등 총 4권으로 나눠 집필했습니다.


정진홍 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 원장은 <아산 연구총서> 집필 취지발표에서 “이번 연구총서를 기획하면서 이미 상당히 알려지고 정리된 아산의 업적보다 아산의 인간과 그가 성취한 일을 비롯하게 한 동력의 바탕에 더 중점을 두고, 아산의 유산이 함축할 미래적 전망을 헤아리고 싶었다”면서


“이번 작업은 아산 연구의 완결이 아니고 바야흐로 시작이다. 치열한 학문적 논의가 이어지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아산현상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연구되어 우리에게 창조적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정몽준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연구총서의 출판을 축하하고, 연구교수의 노고를 위로했습니다. 특히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게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는 아산의 친필을 소개하며 "아버님의 생활태도와 삶의 철학을 가장 잘 표현하는 글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심포지엄은 1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총 4개의 주제를 통해 아산에 대한 연구 결과를 논의하였습니다

 

제1주제 ‘얼과 꿈’은 박태원 울산대 교수, 정진홍 울산대 아산리더십연구원 원장, 강대중 서울대 교수, 소래섭 울산대 교수 등 <아산 연구총서> 집필자가 아산의 정신을 분석했습니다.

 

상상력 메커니즘의 원천은 무엇일까. 정진홍 원장은 아산의 삼위적 자아구조에 주목했습니다. 정 원장은 “과거와 미래의 자아가 현재의 자아와 더불어 있는 삼위적 자아는 아산의 비범한 덕목의 원천”이라면서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호출한다는 것은 과거에의 함몰이나 망각, 미래에의 맹목적인 기대나 환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박태원 울산대 교수는 “이러한 아산의 기업가정신과 자아구조는 그의 얼을 직조하는 결들이다. 아산의 얼을 구성하는 결들은 성공한 기업가에 대한 통념과 선입견을 비껴간다”면서 “그 결들은 예상보다 훨씬 중층적이고 섬세하며 고품격의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제2주제 ‘사람과 삶’에서는 이봉주 서울대 교수, 홍선미 한신대 교수, 최재성 연세대 교수, 김태영 성균관대 교수, 김진 울산대 교수 등 집필자가 그간 흔히 다뤄지지 않았던 아산의 사회복지, 의료, 사회공헌, 교육영역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홍선미 한신대 교수는 아산의 인간존중 정신을 사회공헌의식으로 파악했다. 홍 교수는 “아산의 인간존중은 기업가 아산의 공동체적 경험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통해 구체화된다”면서 “아산은 기업이 단순히 돈을 버는 조직이 아니라 국가와 인류사회에 봉사할 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봤다”고 분석했습니다.


최재성 연세대 교수는 아산의 복지사회 비전이 투영된 아산재단을 주목했습니다. 최 교수는 “아산의 재단 설립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인간중심적 가치관”으로 꼽으며 “아산의 인간존중은 보다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개인을 상정한다”고 풀이했습니다.


김태영 성균관대 교수는 아산병원의 설립과 발전과정을 통해 아산의 정신을 공유가치 시각으로 풀어냈습니다. 김 교수는 “도시-농촌의 의료서비스 차이를 줄이기 위한 의료복지라는 사회적 가치와 의료서비스의 합리성 및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경제적 가치의 두 축은 결국 아산의 ‘해봤어?’라는 도전 정신과 ‘하려면 최고로 해’라는 열정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봉주 서울대 교수는 한국형 복지의 방향성을 아산의 정신과 활동에서 찾았습니다. 이 교수는 “가족주의적 복지 기능의 중요성, 괜찮은 일자리의 공급을 통해 자립이 우선시 되는 근로복지,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를 강조하는 교육복지 등이 한국 사회복지 발전에 함의를 준다”고 강조했습니다.


제3주제 ‘살림과 일’에서는 정진홍 아산리더십연구원 원장의 사회로 이재열 서울대 교수, 류석춘 연세대 교수, 김홍중 서울대 교수, 유광호 연세대 교수 등 집필자들이 한국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50년대에 사업을 본격화한 후 불과 30여 년 만에 한국 최고의 기업집단으로 키워낸 아산 경영의 원천을 탐색했습니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는 아산의 기업관과 자본주의 정신의 바탕에 흐르는 키워드로 유교를 꼽았습니다. 류 교수는 “아산은 서당교육을 통해 유교를 내면화했다. 이러한 유교적 기업관은 사익과 공익의 연결,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라는 믿음이었다”면서 이를 경제적 민족주의로 요약했습니다.


이재열 서울대 교수는 “50, 60년대 한국에는 시장규칙을 구현할 제도적 인프라가 취약해 아산은 강력한 위계로 묶는 계열화를 통해 시장의 부재를 극복하는 내부화 전략을 펼 수밖에 없었다”면서,


“집중된 위계적 소유구조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토대가 됐고, 기업 간 관계도 위계적으로 구조화했다”고 논했습니다. 또한 “노조와의 갈등을 줄이기 위해 가족주의적 기업복지를 강화했고, 단기간에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사내훈련시스템을 대대적으로 확장해 나갔다”고 말했습니다.


유광호 연세대 교수는 현대중공업 사례를 중심으로 기능공 양성과 중산층 사회의 등장에 주목했습니다. 유 교수는 “아산은 사내 직업훈련을 활성화해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기술 인력을 자체적으로 양성해 작업에 투입했다”면서 “그는 기업성장을 통해 얻은 이윤을 고임금과 두터운 사내 복지를 통해 노동자들과 공유해 노동계급의 중산층화를 촉진시켰다”고 분석했습니다.


제4주제 ‘나라와 훗날’에서는 정진홍 아산리더십연구원 원장의 사회로 김석근 아산정책연구원 원장, 왕혜숙 연세대 교수, 김명섭 연세대 교수, 양준석 연세대 교수, 강원택 서울대 교수, 정태헌 고려대 교수 등 집필자들이 아산의 국가와 정치에 대한 업적을 논의했습니다.


왕혜숙 연세대 교수는 발전국가와 재벌의 협력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왕 교수는 “양자 사이의 신뢰를 기반으로 자신의 이익을 초월해 경제발전이라는 공공의 선을 위한 상호협력이 이뤄졌다”면서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댐 건설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 대통령도 아산이 나라를 위해 애쓴 노력과 공적을 인정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김명섭·양준석 연세대 교수는 서울이 1988년 올림픽 개최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아산의 역할에 주목했습니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아산은 민간 부문을 대표해 올림픽 개최에 소요되는 재정 부담을 줄이는 방안과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적극적 유치론에 힘을 실어줬다”면서 “올림픽 유치 결정을 앞두고는 현대 이미지를 활용해 아프리카 및 중동위원들을 집중 공략하는 전략을 펼쳤다”고 말했습니다.


정태헌 고려대 교수는 북한을 포함한 공산권과의 경제협력을 통해 한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 아산의 남북경협 구상과 실행에 주목했습니다. 정 교수는 “남북경협과 북방경제권의 연동은 한국 경제 재도약을 위한 지렛대”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정 교수는 “이는 이념적 명분을 과감하게 벗어난 큰 실리 셈법의 산물이기도 했다”면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은 대규모 인적·물적 왕래를 수반하는 경제협력-평화-실리의 선순환 관계를 말해주는 상징과도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한편, 아산재단은 지난 1979년부터 한국 사회의 발전과 국민복지 증진을 위해 매년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해 오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는 '아산 정주영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국가경제, 복지 등 사회 각 분야에 기여한 아산의 업적과 사상에 대한 학술연구결과를 논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하였습니다.

 

 

■ 인사말

 

<정몽준 이사장>

 

 

건강하신 모습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바쁘신 가운데 많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저희 아버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서 ‘아산, 그 새로운 울림 : 미래를 위한 성찰’이라는 제목의 총서를

출간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산 그 새로운 울림 : 미래를 위한 성찰’은 제목이 참 좋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학자분들께서 이 자리에 앉아계십니다.

최고의 학자분들께서 이 작업에 동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짧게 말씀드리는 것은 결국 아버님에 대한 저의 기억인데요.

제가 아버님 사진을 몇 장 준비해 봤습니다. 사진 보면서 간략히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931년 지금은 북한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에 송전보통학교 졸업식 사진인데요, 앞에 앉아 계신 네 분의 선생님이 상당히 근엄하신 표정입니다. 전부 양복에 조끼가지 입으셨고 나비넥타이를 매신 분도 있습니다.

학생 수는 전부 한 20명 되는 것 같은데 저희 아버님이 뒷줄 가운데에 앉아 계십니다.

요즘 초등학교 선생님이 양복에 조끼 입고 나비넥타이를 매고 근엄하신 분들도 많아지면 우리나라도 다시

좋은 시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아버님 형제는 6형제에 고모님이 한 분 계셔서 7남매인데, 두 분이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아버님은 인민복을 입으셨고, 고모님은 그냥 하얀 옷을 입으셨는데, 이 사진은 아버님과 고모님이 그 당시에 어려운 환경에 살면서도 아주 꿋꿋한 기상을 보여주시고 있는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님의 젊었을 때에 사진 중 이 사진을 제일 좋아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오셔서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실 때 직원분들 하고 금강산에 가서 찍은 사진인데요. 저는 이 사진을 보면 ‘꼭 서부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아버님은 막노동을 하셔서 근육이 잘 발달하셨고 직원분들 역시 몸이 좋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고향이 금강산과 가까워서 금강산 안내원을 하신 적이 있다고 말씀을 해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다음 사진은 어머님하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인데 저 당시도 살림이 굉장히 어려웠을 때입니다. 아버님 양복을 보면 단추가 2개, 더블버튼이라고 하는데 모양을 내셨고 수건도 꽂으셨습니다.

 

아버님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어머님 이야기를 한 번도 안한 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같은 강원도에서 아버님을 만나서 16살 때 중매결혼을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아버님이 서울에서 노동을 하신다니까, 서울이면 강원도보다 좋겠지 하고 오셨는데, 문자 그대로 신설동 언덕위의 단칸방에서 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아침에 막노동 현장에 나가시기 전에 물통에다 물을 2개 담아서 어머님 방 앞에 가져다 놓으면, 어머님은 집안에 살림도구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셨는데 그게 너무 창피해서 우셨다는 말씀을 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이 사진도 많이 보셨을 텐데 저희 가족들이 6.25전쟁이 나서 전부 부산에 피난을 가서 살다가 1953년 6.25전쟁이 끝나면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가운데 할머니가 보이고, 아버님은 저 뒤편에 계시며 여섯째 삼촌 사진, 그 다음에 몽구형 사진, 그 다음에 어머님이 저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버님 형제가 6형제로, 다섯째 삼촌께서 서울법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이게 대학원 졸업사진입니다.

삼촌께서는 대학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서 일하면서 국회 출입기자로 일을 하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2년 후에는 독일에 가서 전공을 바꿔서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거기서 첼로를 공부하고 있는 숙모님을 만나 결혼을 하셨습니다.

 

숙모님께서는 공부를 마쳤으니 먼저 서울에 가라는 삼촌의 말씀대로 서울로 오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장충동 집에 있는데 그 당시에는 전화가 없기 때문에 몇 달에 한 번씩 전보가 옵니다. 하루는 삼촌께서 병원에 가서 작은 수술을 했는데 별일 없다고 전보가 왔습니다.

그날은 집안이 장을 담그는 날이어서 숙모님들이 다 모이셨는데 저녁때 집에 갔더니 숙모님들하고 어머님하고 다 울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전보가 한 장 더 왔는데 그 전보에 삼촌께서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의료사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희 아버님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셨는데 삼촌께서는 좋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독일에 가서 박사 공부까지 하셨기에 아버님은 다섯째 삼촌에 대한 기대, 자부심이 아주 크셨습니다.

그런 삼촌이 돌아가셨으니 아버님의 충격은 매우 크셨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 사진은 어렸을 적 장충동에 살았을 때 뚝섬에 가서 찍은 사진인데요. 아버님께서는 막노동을 하셔서 근육형의 몸매였고, 키가 제일 작은 사람이 저입니다.

가족 모두가 검은색 수영복을 입고 있는데 사실 저는 원래 사진에는 수영복을 입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원본으로 공개하기가 그래서 제가 사진에다가 수영복을 하나 입혀 놓았습니다.

잘 보시면 모두가 똑같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어머님께서 수영복 재료를 사 오셔서 직접 잘라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장충동 집에 참 좋은 꽃이 있어서 저희 가족들은 꽃이 필 때마다 꽃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그 모습입니다. 

 

 

어렸을 때 저하고 몽헌이형 사진입니다.

 

 

다음은 아버님과 어머님이 속리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아버님이 정초에 붓글씨를 쓰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이 오늘 보여드릴 마지막 사진인데요. 제가 워싱턴 존스홉킨스대학에 가서 2년 동안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하루는 아버님께서 워싱턴에 오셨습니다.

제가“무엇을 하고 싶으시냐?”고 여쭤보니 당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으면 참 좋겠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미국 대통령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가 당시 레이건 대통령 비서실장인 베이커 비서실장, 안보보좌관이 리차드 알렌 두 분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오셨는데 존경하는 대통령을 좀 뵈었으면 한다고요.

다행히 이분들이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고, 당시의 만남에서 제가 짧은 영어실력으로 열심히 통역을 했습니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면서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아버님께서는 본인이 북한에서 온 사람이며, 여러 가지 남북관계 이야기를 같이 하니까 레이건 대통령께서 아주 즐거워하셨던 모습입니다. 저 사진에서도 그때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은 설명은 이렇게 마치며, 간략히 말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미국의 <타임>지는 아버님은 ‘많은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영어로“Chung Ju Yung proved a lot of people wrong”’이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타임>의 지적처럼 아버님은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면 더욱 열심히 하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들 하는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착공당시에 많은 반대 속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적은 비용으로 공사를 할 수가 없고 무엇보다 당시 우리형편에는 고속도로가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많았습니다.

아버님은 그보다 3년 앞선 1965년에 태국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경험을 쌓으셨습니다.

월드뱅크에서 발주한 공사였는데 적자를 많이 봤다고 하더군요.

고속도로도 없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에 가서 고속도로 건설을 해봤기 때문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한 정확한 비용과 기간을 계산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67년에는 소양강댐 공사를 했는데 대일청구권 자금이 투입된 공사였기에 당시 설계를 일본인이 했으며 시멘트 댐으로 설계를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일본이 설계해 놓은 콘크리트댐 대신 소양강에 많이 있는 모래와 자갈을 이용하는 사력댐을 건설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들이 당신은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람이 이렇게 커다란 댐의 안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느냐고 모욕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시멘트가 굉장히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는데, 만약 소양강댐을 시멘트로 지었으면 우리나라에 시멘트가 더욱 부족한 현상이 벌어졌을 거라고 생각을 하셨고, 아버님은 결국 사력댐, 즉 모래자갈댐으로 소양강댐 공사에 성공하셨습니다.

 

미국의 포드사와 결별하고 독립된 자동차 회사를 만든다고 하셨을 때, 기술적 그리고 자본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현대중공업을 만드실 때는 혼자서 새벽에 자동차를 운전하시다가 겨울바다에 빠졌다가 살아 나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공장을 지으면서 공장의 제품을 만든다는 것, 조선소를 지으면서 초대형 유조선을 동시에 건설한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아주 유능한 기술자들을 전부 모아놓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 아버님께서 바다에 빠졌다가 돌아오셔서 한 일주일 후에 가족들에게 해주신 말씀이, 자동차를 운전하다 방파제 아래 바다에 빠졌는데 ‘만약에 내가 여기서 살아서 나가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무모하게 사업을 진행하다가 잘 안 되니까 자살을 했다고 말 할 것 같아서 꼭 살아서 나가야지 다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다른 이야기는 다 들어도 그 이야기는 들으면 절대로 안 되었기에 꼭 살아서 나가야지라고 생각하셨답니다. 그래서 차문을 열고 방파제의 한 부분을 겨우 잡고 있었는데 한참 있다가 경비원이 한 명 와서 “그 아래 누구 있냐?”고 물어서, “누구긴 누구야, 사람이지 빨리 건져라”라고 말씀하셨고, 결국 바다에서 나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1971년 알래스카에 가서 협곡에 다리를 건설했던 일, 1972년 파푸아뉴기니아라고 지금도 가기가 힘든 나라지만, 이곳에 지하수력발전소를 건설했던 일,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일, 이런 일들이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을 해봅니다.

 

살아계셨을 때 많은 일을 하셨지만 지금 아버님을 생각하면 그래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은 그 아쉬운 부분을 채워주는 좋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평소 스스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셨기 때문에 아마도 당신에 대한 학술총서가 나온다고 하면 대단히 쑥스러워하셨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아버님에 관한 학술총서를 내는 것이 과연 아버님 뜻에 맞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는 아버님은 당신께 특별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평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 받으신 정규 교육은 서당공부 3년, 초등학교 교육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가출하신 다음에는 건설현장 노동자, 인천부두 노동자로 시작해서 평생 일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유한 노동자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나는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등한 자본금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는 의미였습니다.

 

비록 정규교육은 받지 못하셨지만 아버님께서는 삶의 철학과 신념을 살아계시는 동안 열심히 생각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당에서 배우신 사서삼경을 즐겨 말씀하시면서 공자와 맹자의 사상 속에는 서구의 합리적 개인주의의 사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맹자가 그래서, 맹자를 더욱 좋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울산의 현대중공업 공장에는 아버님이 지으신 글씨가 써있습니다.

‘우리가 잘 되는 것이 나라가 잘 되는 것이고, 나라가 잘 되는 것이 우리가 잘 될 수 있는 길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글을 음미해보면 아버님은 서구식의 개인주의와 우리 동양식의 공동체 의식을 조화시키려고 애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고민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동안 아버님에 대한 수많은 책이 나왔습니다만 아버님이 직접 쓰신 두 권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이 땅에 태어나서>보다 아버님의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 책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진홍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께서 아버님의 일생에 대한 학술적 고찰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셔서 저도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삶과 철학, 업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격동기 우리나라의 경제, 사회,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를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교수님들의 노력이 담긴 글들을 받아보니 아버님께서도 크게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버님의 성품을 가장 잘 표현하는 글귀는 ‘담담한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께서는 ‘담담한 마음을 가집시다. 담담한 마음은 당신을 굳세고, 바르고 총명하게 만들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한자를 보면 ‘담(淡)’ 자는 두 개의 뜨거운 불을 차가운 물로 가라앉히는 형상으로, 조용한 가운데 치열하게 자기 자신에 도전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담담한 마음’으로 아버님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면서 아버님을 기념하는 총서의 출판을 자축하고 싶습니다.

 

오래 전 아버님께서 쓰셨던 ‘새봄을 기다리며’라는 글을 입구에 비치해 놓았습니다. 일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바쁘신데 참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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