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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19
  • 부문 : 아산상
  • 소속(직위) : 꼬람똘라병원
  • 수상자(단체) : 이석로

방글라데시에 펼친 희망의 인술

 

 

“방글라데시에서 의료 봉사할 의사를 찾습니다.”

전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광주기독병원에서 인턴 생활을 하던 이석로(55) 원장은 병원 게시판에 붙은 한 장의 안내문을 보고 발길을 멈추었다. 의사로서 나아가야 할 진로와 보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던 시점이었다.

 

병원장을 찾아가 조심스럽게 지원 의사를 내비쳤지만, 기대와 달리 원장은 단호했다.

“전문의 정도는 돼야 의료봉사를 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지 않겠어요?”그저 해프닝처럼 지나고 말았을지도 모를 그 일을 그는 가슴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4년여의 레지던트 생활을 마치고 다시 원장을 찾았다.

 

“선생님, 그 말씀 지금도 유효합니까?”그는 병원에 남아서 과장이 되고 교수가 되거나, 독립해서 개업의가 되는 길을 마다하고 방글라데시 오지로 떠났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쌓아온 신앙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3년만 봉사를 하고 돌아오겠다는 생각이었다.

 

“인생에서 3년 정도는 경험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의사생활을 하더라도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죠.”

 

방글라데시의 작은 마을에서 인술을 펼치다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서 북동쪽, 자동차로 2시간 정도를 달리면 꼬람똘라(Karamtola)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1992년 한국의 기독교병원 연합단체인 콤스(Korean Overseas Medical Mission Society,KOMMS)가 이 마을에 세운 병원이 바로 꼬람똘라병원이다.

 

꼬람똘라병원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인근 지역에 병원이 하나도 없어서 주민들은 아파도 치료를 받지 못했고, 민간처방에 의지하다가 오히려 질병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병원이 설립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병원의 규모도 작고 의료시설도 열악했다. 방글라데시에 도착하자마자 당시 병원장이던 현지인 의사 1명과 함께 하루에 60~70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강행군을 이어갔다.

저렴한 비용으로 치료를 해주었고, 경제 상황에 따라 무료 진료는 물론 무료 수술까지 해주다보니 환자들이 꾸준히 늘었다.

 

방글라데시 생활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열악한 의료시설이 아니라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었다.

 

“구걸하는 사람을 도와줘도 이곳 사람들은 크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구걸을 하는 바람에 당신이 나를 도왔고, 그로 인해 당신이 신의 축복을 받게 됐으니 오히려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죠.”

 

이런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든 일도 많이 겪었다. 선의를 베풀고도 오히려 욕을 먹을 때면 화도 났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으면서 그는 조용히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됐다.

 

“더러운 물을 가만히 두면 찌꺼기들이 가라앉아서 윗부분이 깨끗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 물을 휘저으면 가라앉아 있던 찌꺼기들이 떠오르면서 다시 더러워지죠. 저를 화나게 한 사람은 단지 물을 휘저었을 뿐입니다. 물을 휘저은 사람이 나쁜 걸까요? 아니면 물

자체가 더러운 물인 걸까요?”

 

그동안 자신이 봉사라는 이름으로 해왔던 많은 일들을 남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했다. 현지인들을 접하면 접할수록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됐다.

 

현지 사람들을 조금씩 이해하면서 그들을 위한 치료 방법도 바꾸었다. 초창기 환자들중에는 결핵 환자들이 많았는데 치료를 해도 결핵 환자가 줄어들지 않은 이유가 끝까지 치료를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에 ‘시크릿 머니’를 고안해내서, 무료 진료를 해주면서도 우리 돈으로 1만5천 원정도인 1천 타카를 보증금 형태로 먼저 내도록 하고 치료가 완료되면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환자들은 보증금을 받기 위해서 치료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열심히 병원을 찾았고 그 결과 결핵 완치율도 높일 수 있었다.

 

절반의 희생, 병원이 성장하는 계기를 맞다

 

이석로 원장은 병원이 성장하려면 외과의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지원 받는 급여를 절반으로 줄이는 대신 남는 돈으로 외과 전문의 한 명을 추가로 파견해줄 것을 콤스 측에 요청했다. 절반의 희생 덕분에 2002년 외과 전문의가 파견되면서 진료 영역이 확장되었고, 병원이 급성장하는 전기를 맞았다.

 

2003년부터는 꼬람똘라병원의 원장을 맡으면서 병원의 자립을 가장 큰 목표로 세웠다. 이를 위해 현지 의사들을 교육시키는 데 집중했다. “필요하다면 의료기술을 배워서라도 가르쳐 주겠다”며 잘 모르는 의료 기술들은 직접 배웠다. 외과가 생기면서 마취과가 필요해지자 안식년을 이용해 직접 한국에 나가 마취에 대해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시간이 생길 때마다 한국에 나가서 내시경도 배우고, 초음파도 배우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외과 수술 몇 가지도 배우고 돌아와서 현지 의료진들에게 가르쳤다.

 

치과에서 산부인과까지, 종합병원 면모 갖춰

 

자립도가 높아지면서 진료에 필요한 각종 장비 등을 후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씩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방사선 장비와 초음파 장비를 잇달아 도입하고 2005년부터는 현지인 치과의사를 통해서 치과 진료를 시작했다.

 

어려운 외과수술을 위해 모교인 전남대 의대의 지원도 받았다. 전남대 치과와 정형외과팀이 현지를 직접 방문해 구순구개열과 선천성 기형을 가진 아이들을 직접 수술했으며, 지금까지 매년 무료 의료봉사를 이어오고 있다.

 

방글라데시는 강한 자외선으로 인해 70만 명 이상이 실명으로 고통 받고 있는 나라다. 이에 2009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하트하트재단 후원으로 병원 내에 안과 클리닉을 열고 백내장 수술을 특화시켜 운영하고 있다.

 

극빈 계층에게는 무료 수술을 지원하고, 일반 저소득계층에는 최소 비용만을 받고 있다. 2018년 한 해 동안 1,300여 명의 환자들이 백내장 수술을 받았으며, 다카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 전역의 환자들이 시력을 되찾기 위해 꼬람똘라병원을 찾고 있다.

 

의료진도 많이 충원해 지금은 현지인 의사 12명을 포함한 의사 14명과 내과, 외과, 소아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산부인과 등을 갖춘 규모 있는 종합병원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매일 300여 명의 외래환자들이 찾는 병원으로 성장했다.

 

경제적 자립 위한 다양한 사업에도 참여

 

이석로 원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교육이었다. 직장을 갖기 힘든 여성들을 위해 2007년 3년 과정의 간호학교를 설립했다. 학비는 전액 무료이며 졸업생들 중 일부는 꼬람똘라병원에 채용했다. 매년 10명씩 지금까지 100여 명이 간호학교를 졸업해 자립할 수 있었다.

 

생계수단이 없는 주민들을 위한 지원사업도 진행하였다. 새끼염소를 분양해주거나 묘목을 나눠주고 심게 했다. 비싼 돈을 주고 인력거를 빌려서 영업하는 인력거꾼들의 자립을 위해 인력거를 만들어주고 오랜 기간에 걸쳐 갚도록 했다. 이외에도 마을이나 학교에 우물을 파는 사업, 장학 사업 등 방글라데시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3년, 그리고 다시 3년

 

3년을 예상하고 왔던 방글라데시 생활이 어느덧 25년째로 접어들었다. 이 원장은 오로지 다가올 앞으로의 ‘3년’만을 생각하고 있다.

 

“3년마다 스스로를 평가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 현지인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됐는지 생각해보는 거죠. 제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현지인들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면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겠죠.”

 

이 원장의 봉사 활동은 쉼이 없다. 그의 눈은 언제나 더 낮은 곳을 향하고 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그가 서있을 곳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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