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19
- 부문 : 의료봉사상
- 소속(직위) : 아프리카어린이돕는모임 현지법인 대표
- 수상자(단체) : 김혜심
42년 동안 변함없이 지켜온 봉사의 마음
한국에서 출발하면 꼬박 하루가 걸려야 겨우 도착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라모코카, 거기서 차로 8시간을 더 달려야 당도하는 에스와티니의 까풍아. 그 곳 사람들에게 김혜심(73) 박사는 ‘마더(어머니) 킴’ , ‘꼬꼬(할머니) 킴’이다. 스스럼없이 친근해서다. ‘교무님’이기도 하다. 원불교 성직자를 일컫는 직함이고 그들로 선 발음하기 꽤 어려운 한국어이지만 존경을 표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까풍아에는 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추장이 있고, 라모코카 역시 추장이 이끄는 마을이지만 그들 삶에 가장 가까운 지도자는 김혜심 박사일 것이다.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건강한 미래를 선물하다
김혜심 박사는 원불교 교단이 에스와티니(1998년)와 남아공(2002년)에 설립한‘Future for African Children(아프리카어린이돕는모임)’의 현지법인 대표다. 아프리카는 이전에 없던 발령지였기에 교단으로서도 난감한 일이었으나 김 박사의 요청이 워낙 간절했다.
김혜심 박사 역시 첫길부터 아프리카에 터를 닦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다. 1995년 무엇이든 돕겠다는 생각으로 몇 차례 답사를 해보았는데 아무리 들여다봐도 만연한 가난과 질병을 단번에 해결할 방도는 없어보였다. 단 하나, 기대해봄직한 가능성은 아이들의 미래였다.
곧 원광대학교 약학대 학장 자리를 내려놓고 아프리카 아이들을 품기로 했다.
콧물 줄줄 흘리던 세 살배기 아이가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려했으니 귀국 생각은 아예 접고 살았다. 현지에서도 그처럼 활동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없었기에 뜻하지 않은 주목도 받았고 명성도 높아졌다.
까풍아에 유치원을 개원했을 때는 국왕이 직접 방문해서 ‘엥콩과네니(Engcongwaneni, 최고)’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라모코카의 ‘방과 후 교실’에선 남아공 태권도 국가대표가 9명이나 배출됐다. 센터에서 컴퓨터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현지 한국기업에 취업한 청년도 6명이나 된다.
한국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시설이나 성과처럼 보이지 않겠지만 그곳에선 놀랄 만한 일들이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최고 유치원의 이유가 될 만큼 보건위생이 열악했다는 뜻이고, 청소년들이 취미를 즐기거나 꿈을 키워볼 공간이 전무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교육 기회로 여는 미래, 의료 봉사로 지키는 현재
아프리카 속담에 이르기를 ‘한 아이를 키우는 데에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문제는 온 마을 어른들이었다. 유치원에 온 아이들의 코에서 기생충이 기어 나오는 걸 보고 기겁을 한 적이 있다. 그 길로 20만 명분의 구충제를 한국에서 조달해왔고 50여 개 학교에 전달했다. 그런데 해가 바뀌도록 먹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일까? 답답했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조언도 들었고, 국제단체의 물량공세식 지원이 타성을 키웠다는 해석도 접했다. 오죽하면 “아프리카에선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며 그러려니 하라는 위로도 받았다.
당장 학교마다 찾아다니며 아이들의 입에 구충제를 직접 넣어주었다. 그러기를 3~4년.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2010년에 이르러선 에스와티니 정부 주도로 모든 학교에 구충제 배급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유치원에 잘 나오던 아이가 보이지 않아 집에 찾아갔더니 이미 죽어있던 일도 겪었다. 사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에이즈였다. 아프리카에서 에이즈는 여전히 천형과도 같은 질병이었고, 일부다처제에 조혼 풍습까지 있는 에스와티니에서는 실태가 더욱 심각했다. 열악한 위생과 영양 탓에 국민 평균 수명도 32세에 불과했다. 아뿔싸.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려면 부모들의 현재도 함께 돌봐야 했던 것이다.
보건소와 에이즈 쉼터 운영이 불가피했다. 더해서 매주 수요일은 ‘중증 재가환자 방문 치료의 날’로 못박아두었다. 아이들을 살피느라 집집마다 다녀보니, 온갖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마땅한 의료조치 한번 못 받고 고통에 몸져누운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간단한 의약품과 영양식이라도 챙겨서 찾아가야했다.
틈틈이 까풍아보다 더 열악한 의료 소외지역으로도 의료봉사를 간다. 때에 따라 현지에 정착한 한인 의료진과 은퇴 후 단기 봉사를 하러 온 미국인 의사까지 합류한다. 조촐하지만 에스와티니 의료시스템에서는 드문 활동이다. 따로 홍보할 필요도 없이 주요 매스컴이 순회 일정을 보도하고 지역에서 방문 요청을 해온다. 부족한 인력과 장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소록도에서 배운 평생의 교훈 그리고 감사
쉰 무렵에 찾은 아프리카에서 어느덧 일흔을 훌쩍 넘겼다. 높은 고도에 적응하느라 뚝 떨어진 청력쯤이야 대수롭지 않았다. 디스크와 당뇨, 두 번의 암수술도 아프리카를 떠날 이유가 되지 못했다. 1년에 두세 달, 업무를 처리하거나 급한 치료를 받으러 한국에 머물 땐 외려 향수에 젖을 지경이다. 그러고 보면 42년 전에도 그랬다.
서른 무렵, 약대 박사과정 중에 있던 김혜심 박사는 여름방학 두어 달을 틈타 의료봉사를 할 요량으로 소록도를 찾았다. 그리고 이듬해부터 8년간 국립소록도병원의 약사로 봉사하며 한센인들을 돌봤다.
2016년,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고흥군에서 명예군민증을 수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소록도를 찾았던 첫 날이 떠올랐다.
이미 원불교 교무의 길을 걷던 터라 특별한 결심은 필요치 않았다. 고흥부터는 물도 안 마신다고 할 정도로 한센병에 대한 인식이 형편없던 시절이었지만 약학자로서 휘둘릴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무서웠다. 도망치듯 섬을 나왔다. 그대로라면 서울로 돌아 왔어야하는데 고흥군을 떠나지도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다시 소록도행 배를탔다.
찬찬히 마주하니 그이들이 짓는 웃음이 보였다. 말을 나누다보니 고향마을 이웃마냥 살갑기도 했다. 나름대로 숭고한 뜻으로는 하루도 넘기지 못했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그때 마음에 새겨진 듯하다.
타인을 향한 헌신은 결국 자신을 위한 행복 추구다. 행복했기에 8년을 살았고, 약학대 학장 일을 하면서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의료봉사를 핑계로 소록도를 찾았다.
곁에서 지켜본 소록도 주민들은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자립하려 애를 썼다. 자립심은 질병을 이기는 힘이 되기도 했다. 훗날 김혜심 박사가 까풍아에서 암송아지를 분양하고 협동농장을 운영해 주민들에게 소득원을 마련해주려 한 것도 소록도에서의 경험 덕분이었다.
한센병이 더 이상 불치와 공포의 대상이 아닌 것처럼 아프리카의 가난과 질환도 더디지만 반드시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볼 때마다, 축 처져있던 주민들이 일을 해보겠노라고 센터를 찾아올 때 마다 믿음은 더욱 깊어진다.
다행히, 그 믿음이 옳다하는 이들의 도움도 꾸준하다. 덕분에 더 활발히 봉사할 수 있었고 그만큼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