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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19
  • 부문 : 효행ㆍ가족상
  • 소속(직위) : 서울 마포
  • 수상자(단체) : 여환숙

두 번의 실명, 가족의 사랑으로 이겨내다

 

 

서울 마포구 연남동에 자리한 침술·지압·안마원, 여광원(呂炚洹)의 여환숙(67) 원장은 깐깐한 사람이다. 바른 소리도 잘 하고 셈도 바르다. 옛일을 얘기할 때도 꼼꼼하게 적어둔 수첩을 읽듯 틀림이 별로 없다. 하상복지재단, 한국시각장애인여성연합회, 서울가톨릭시각장애인선교회, 연을 맺거나 적을 둔 단체 3곳에서 감사직을 부탁할 만하다.


시각장애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여환숙 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잘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첫 번째 실명, 어머니 가슴에 박은 못

 

중학교 졸업을 앞둔 여환숙 씨가 기침을 너무 오래 하자 어머니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 다섯과 남편을 먼저 보내고, 홀로 키운 3남매의 막내였다. 몇 해 전 갓 스물이 된 아들마저 사고로 생을 달리 했으니 어머니 눈에 예사롭지 않았다.

 

급한대로 동네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였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앞이 보이질 않았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전국에 유명하다는 안과는 다 찾아다녔다. 시집 간 17살 위 언니는 아끼고 아낀 생활비로 치료비를 보탰다. 그렇게 노력했어도 1960년대 당시 의학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최종 진단을 받았다.


그렇잖아도 한창 예민할 나이였다. 죽고 싶다는 딸을 달래며 눈물로 곁을 지키는 어머니에게 모진 소리도 많이 했다. “엄마는 안 보여 봤어?” 그 말을 내뱉은 게 지금도 제일 속상하다. 내 아이를 키우다보니 작은 기침 소리에도 가슴이 덜컥한 것을, “그때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아끼며 살아야지”


10년 넘게 집에서 라디오만 끼고 살았다. 겨우 받아들이고 마음을 추슬러 서울에 있는 맹학교에 입학했다. 홀로 상경해서 시작한 늦깎이 공부는 힘들었지만, 자립을 하려면 반드시 마쳐야 했다. 독하게 버텼다. 어차피 눈물샘마저 파손되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맹학교를 졸업할 무렵, 인공각막시술의 기회가 여환숙 씨에게 찾아왔다. 붕대를 풀자 의사선생님의 손이 보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그때 마음먹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책임지고 언니에게 보답”하겠다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아끼며 남을 돕고 살겠다”고.


침술원을 열고 열심히 일했다. 몸이 좀 고되도 안마봉사도 기쁘게 다녔다. 특히나 즐거웠던 건 책을 읽어주는 봉사였다. 그렇게 자리를 잡고 어머니도 모셔왔다. 남편될 사람 강신권 씨를 만난 건 마흔 넘어서였다. 강 씨는 척추장애 2급에 6살 딸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사위와 장모, 딸과 계모는 여느 가족처럼 다투기도 하고 정겹기도 하면서 한 가정을 꾸렸다. 적잖은 나이에 아이도 가졌다.
 

두 번째 실명, 그러나 가족이라는 빛
 

더없이 행복한 순간, 시력에 또 문제가 생겼다. 임신하며 차츰 나빠지더니 출산할 땐 완전한 실명. 갓 태어난 아들 얼굴도 못 보았다. 그렇다고 인생이 암전된 듯 실의에 빠지진 않았다. 곁에는 책임질 가족이 더 늘어 있었다.


어머니도 딸의 실명에 마냥 눈물짓지만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도와주다 손주 재롱이 한창일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는 언니가 채워주었다. 고령에 병환이 깊어지기 전까지 여환숙 씨의 두 아이들을 살뜰히 보살펴주었다.


남편은 척추결핵이 줄곧 재발해 거의 해마다 수술을 받다시피 했다. 결국엔 감염으로 장천공이 와서 대수술까지 했다. 그랬어도 ‘마누라 돈은 안 쓰겠다’며 용돈벌이라도 하려고 애썼다.


딸은 제 친엄마만 그리워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여환숙 씨에게 ‘엄마’라고 불러주었다. 결혼을 하고는 친정엄마에게 하듯 미주알고주알 전화 통화가 길어졌다. 친정나들이도 자주 온다. 아들은 또래 아이들이 그럴법하게 앞 못 보는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엄마는 못하는 게 없다”며 자랑을 했다. 틱 장애로 고생했지만 꾸준히 약물 치료를 받아서 지금은 대학에 잘 다니고 있다.


여환숙 씨에게 가족은 서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시력을 잃고 시련은 겪었을지언정 가족이 지켜줬고, 가족을 지키느라 애쓴 삶이다. 그 칭찬을 받는 듯해서 더없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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