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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상

  • 시상명 : 아산상
  • 년도 : 2018
  • 부문 : 사회봉사상
  • 소속(직위) :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 수상자(단체) : 허보록

갈 곳 없는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벽안(碧眼)의 신부

 


25년간 아이들과 함께하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허보록(59·영세명 필립보, 본명 Philippe Blot) 신부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의 아버지로 통한다. 프랑스 출신인 벽안의 허 신부는 신부 서품을 받은 1990년 한국에 파견돼 25년 동안 가족 해체나 학대, 방임 등의 이유로 보호가 필요한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가정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생활할 수 있도록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을 설립해 운영해왔다. 그동안 허 신부의 그룹홈을 거쳐 간 청소년은 줄잡아 200여 명에 이른다.


테레사 수녀의 길을 걷고자 신부가 되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허보록 신부의 인생의 롤 모델은 테레사 수녀(1910~1997)이다. 어릴 때부터 봉사에 헌신하는 테레사 수녀를 누구보다 동경해 가톨릭 봉사단체에서 활동했다. 1979년 테레사 수녀가 노벨평화상을 받고 설교하는 방송을 보면서 감동해 테레사 수녀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 테레사 수녀의 저서를 사서 읽기도 했다. 허 신부는 고향인 프랑스 노르망디의 캉대학교 국제경제학과에 다니며 참석했던 기도모임 중 테레사 수녀의 영성을 확인하고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소 운동을 좋아했던 허 신부는 프랑스의 징병제에 따라 알프스의 스키부대에서 1년간 복무했다. 제대 후 1984년 로마에 있는 그레고리아나 신학대에서 6년간 선교와 영성을 공부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재학 중이던 1986년 입회했다. 1990년 대학 졸업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사제 서품식에서 허 신부는 “평생 마더 테레사처럼 버림받고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서원했다.


무의탁 청소년과의 첫 만남


허보록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시에 따라 부임한 곳은 한국이었다. 허 신부가 2년간 서강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우리말을 배운 뒤 1992년 처음 맡은 보직은 강화도 내가 공소(본당보다 작은 천주교 교회) 신부였다.


1993년 안동교구인 경북 영주의 하망동성당 보좌신부로 부임한 허 신부는 그해 11월 성당 안에서 저소득층 노인들에게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는 급식소 주변을 서성이는 행색이 초라한 10대 아이들 5명을 발견했다. 허 신부가 아이들을 불러 배불리 먹여 보냈더니 그날 저녁 아이들이 다시 찾아와 “잘 곳이 없으니 재워달라”고 했다. 상담해보니 모두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었다. 이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허 신부는 작은 집을 구해 살게 했다. 허 신부가 한국에 와서 처음 설립한 그룹홈 ‘다섯 어린이집’이다. 허 신부의 무의탁 청소년들을 위한 삶은 이렇게 시작됐다.


안동에서 일어났던 아픈 일화


허보록 신부는 이듬해 경북 안동 옥산성당 주임신부로 자리를 옮겼다. 허보록이란 한국 이름은 당시 안동교구장인 박석희 주교가 한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려면 필요하다면서 지어준 이름이다. 안동에서도 무의탁 청소년의 생활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낀 허 신부는 1996년 9월 낙동강 옆 구 안동농민회관 건물 2개 동을 개조해 ‘성프란치스코의집’과 ‘성글라라의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들 시설은 지금도 유지되며 운영되고 있다. 


1997년 초여름 큰 사건이 벌어졌다. 한 수녀의 부탁을 받아 살인 전과자에게 그룹홈의 잡일을 맡겼는데 하루는 술에 취한 그 전과자가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칼부림 난동을 부렸다. 이를 말리려던 허 신부는 전과자가 휘두른 칼에 가슴이 깊이 찔렸다. 허 신부는 안동병원에서 6개월 치료받은 데 이어 다시 프랑스에 가서 6개월 동안 더 치료를 받았다. 허 신부는 프랑스에서 건강을 회복하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하느님이 정해서 보내주신 곳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 계속 사목의 길을 걷겠다”며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귀국 후 새로 시작한 그룹홈


1999년 한국에 돌아온 허보록 신부를 기다리는 곳은 수원교구였다. 허 신부의 영적 지도신부였던 파레몬도 신부가 허 신부에게 군포지역에서 청소년 사목을 해주기를 부탁했다. 마침 과거 양로원으로 사용됐던 군포시 당동 1층 주택이 비어있는 상태였다. 그해 허신부가 그곳에 개설한 그룹홈 ‘성요한의집’은 지금까지 20년째 운영되고 있다. 허 신부는 또 2007년에는 같은 건물에 또 다른 그룹홈‘성야고보의집’을 추가로 개설했다. 2009년에는 과천에 ‘성베드로의 집’이라는 그룹홈을 하나 더 만들었다. 허 신부는 사정이 어려운 새터민 자녀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성요한의집에서 2명, 베드로의집에서 1명 등 3명의 새터민 자녀를 돌보고 있다.


“신부님 같은 분은 세상에 없다”


허보록 신부의 도움을 받다가 만 19세가 지나 그룹홈을 떠난 아이들(자립생)은 지금까지 모두 200여 명에 이른다. 특히 허 신부가 처음 운영한 다섯 어린이집의 자립생들은 명절이 아닌 날에도 틈틈이 그룹홈을 찾아와 허 신부와 후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다섯 어린이집 출신으로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허영아(37) 씨는 “1993년 처음 허보록 신부님을 만난 이후 줄곧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다”며 “저처럼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찾아내고 돌보아주신 신부님 같은 분은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고마워했다.


군포 그룹홈 4층 건물 옥상의 컨테이너 사제관에서 만난 허 신부는 28년간의 한국 생활에 대해 묻자 그룹홈과 교회의 일을 내 일처럼 여기며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과후원자의 이름과 선행을 일일이 들려줬다. 군포 봉사자 중에는 그룹홈 개설 때부터 지금까지 20년간 도와준 봉사자도 있다. 허 신부는 “한국에서 아름답고 열심히 사는 분들을 많이 만나 큰 도움을 받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분들이야말로 하느님이 내게 보내주신 천사와 같은 가족이자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사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준 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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